Frank Lloyd의 "Falling Water"보다 300년 앞선 송시열의 남간정사
남간정사는 조선조 중엽의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세운 건물입니다.
송시열은 소제(동구 소제동)에 살고 있는 동안 홍농촌에 서재를 세웠는데, 이후 이 남간정사는 송시열 이후 문집을 판각하고
이를 보존하면서 송시열 학파의 주요한 유적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남간정사는 계곡에 있는 샘으로부터 내려오는 물이 건물의 대청밑을 통해 연못으로 흘러가게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정원 조경사에 있어서 하나의 독특한 경지를 이루게 한 조경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간정사 오른쪽에 있는 기국정은 소제동에서일제시대 초에 이전한 것이고, 뒷편의 언덕에 있는 송시열의 영당인 남간사는
후에 건축된 건물입니다. 남간정사 판액은 김상현의 맏손자인 곡운 금수중의 글씨입니다.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을 보존한 장판각 등이 한 곳에 모여 있어 조선시대 건축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됩니다.
남간정사의 가을정경.
목백일홍이 피어 있는 남간정사의 정원이 아름다운데, 바쁘다보니 목백일홍이 피어있는 정경을 놓쳤습니다.
우암 송시열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위 사진은 우암의 표준영정을 촬영한 것인데, 우암의 모습에선 카리스마가 느껴집니다.
송시열은 조선시대 좌의정을 지냈고,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文正. 송갑조의 아들입니다.
1607년 선조 40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천 외가에서 출생하였습니다. 8세때부터 송이창의 후의에 힘입어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됩니다. 1625년부터 연산에 있는 김장생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칩니다. 1633년 생원시에 응시하여 논란 끝에 최명길의 지원에
힘입어 1등으로 합격하고 최명길 등의 천거를 받아 경릉참봉이 되었습니다. 그후 효종이 봉림대군으로 있던 왕자 시절
스승으로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낙향하여 10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17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벼슬에 나아가게 됩니다.
효종 초에 집의에 올랐으나 청나라와 밀착하여 있던 김자점이 영의정으로 발탁되자 사직하고 낙향했으며, 뒤에 김자점 일파가 물러난 뒤
스승 김집등과 함께 등용되었으나 스승 김집이 대동범의 시행을 반대하다가 이를 추진하던 김육과 충돌하여 시골로 낙향하자
함께 벼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후 후진 양성에 전력하고 서인 사류들의 중심이 되어 인조 대 이후 분열되어 있던 서인 세력을
재통합하는 구심점이 되었고, 그의 스승이 반대하던 대동법의 시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군포 부담이 소수의 양민에게
집중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호포법의 시행을 주장하는 등 세금제도의 개혁을 위주로 한 사회 경제적인 개혁안을 적극 수용하여
이이 이래 서인 세력의 구심이 되었습니다. 1658년 찬선에 등용되고 이조판서에 승진하여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효종과 독대하여 효종으로부터 갖옷을 하사 받고 북벌의 뜻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는 현종이후 그의
권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효종의 장례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삼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에 대하여
기년설을 건의하여 이를 채택케 함으로써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 판중추부사 좌참찬 등을 역임하는 동안 서인의
지도자로서 활약했습니다.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에 기용되고, 다음해 좌의정이 되었습니다.
현종 연간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점차 국왕 현종과 긴장이 형성되고 이에 대해 남인들이 유생들의
상소 등을 통하여 공격하고 효종의 능을 옮기는 문제 등으로 인하여 점차 위기를 맞는 가운데서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황후와
현종이 사망함으로써 이어진 복제문제에서 자의대비의 복제를 대공설을 주장한 것이 문제되어 실각하게 됩니다.
그후 남인이 득세하자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한 죄로 여러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던중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으며, 1683년 벼슬을 사양하고 봉조하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다시 등장하여 기대를 모았으나 실제 건의한 정책 등이 서인 소장 사류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상황에서 남인데 대한 처벌문제가 논의될 때 과격한 방법으로 숙청을 도모하고, 1682년 김석주, 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상고변 사건 등에서 김장생의 손자라는 이육로 고변을 통한 남인 축축 음모에
가담한 김익훈을 두둔하였으므로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됩니다. 게다가 이전에 제자인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가
윤휴와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을 비판하면서 관계가 악화되고 윤선거가 죽은 뒤 병자호란에 강화도에서 순절하지 않고
도망한 일을 행장에 그대로 기록한 일로 윤증과의 감정 대립이 악화되어 훈척들과의 연관등을 의심하며 윤증의 입장을 지지하던
젊은 사류들이 윤증尹拯등을 중심으로 뭉쳐 서인들의 분열이 이루어지자 노론의 영수가 됩니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 은거하게 되는데 1689년 1월 숙의장씨가 아들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그도 세작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됩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이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직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지게 됩니다.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거유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을 이루었고, 예론에도 밝았던 인물입니다.
성격이 과격하여 많은 정적을 가졌으나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냈습니다. 문묘 효종묘정에 배향되고 덕원, 화양등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고, 그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습니다.
그이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으나, 1716년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고, 영조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게 됩니다.
부끄러울 "치恥"자로 병자호란과 정묘재란을 통해 오랑캐라 여겨왔던 청에게 두 차례나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조선의 참담한 심정을 담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 이 "치恥"자는 송시열 뿐만 아니라
소중화小中華 의식으로 충만해있던 당시 조선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宋子大全의 일부.
우암 사적공원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는 우암 송시열의 송자대전宋子大全.
남간정사는 1600년대에 건축된 목조건물입니다.
1935년에 건축된 Frank Lloyd Wright의 "Falling Water"가 건축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비하여
남간정사의 환경친화적인 건축공법은 건축학에서 보다는 정원조경학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면 뭔가 아쉬운 대목이 듭니다.
흐르는 물위에 지었다는 점은 같은데 남간정사가 이미 300년 이상 앞서 건축되었고 짜맞춤공법으로 지어진 목조건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남간정사의 건축공법이 어쩌면 Falling Water보다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간정사의 유려하고 기품있는 목조건물과 " Falling Water"는 격이 다릅니다.
"Falling Water"는 Frank Lloyd Wright라는 유명한 건축가의 대표작이지만, 남간정사를 설계하고 시공한 사람은 기록에 이름조차 없습니다.
현대 건축가Architecture 3대 거장 중 한 명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대표작인 "Falling Water낙수장落水莊"은
미국 펜실베니아주 밀런 근교에 위치하고 있으며, 흔히 "자연과의 친화"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건물입니다.
카프만 주택이라는 원래 이름보다 "Falling Water"이라는 별명으로 더욱 알려지게 된 것은
역시 집 밑으로 물이 흘러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쇼킹한 컨셉 때문일 겁니다.
프랭크 로이드Frank Lloyd의 Fallin Water는 1935년에 건축되었고, 콘크리트로 시공한 건물입니다.
겉모습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서랍장에서 서랍을 마구 빼놓은 것처럼 보이고 각 층마다 모두 분절된 것처럼 보이지만,
들어가보면 바닥에 문턱조차 없을 정도로 연속된 공간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각 실이 거의 외부와 연결되어있는 설계입니다.
서랍을 빼놓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각 층마다 지형의 경사에 따라 조금씩 뒤로 물러나 있기 때문인데
이것 역시 자연과 어우러지려는 설계자 Frank Lloyd Wright의 노력의 결과입니다.
무엇보다도 낙수장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폭포와 바위 위에 떠있는듯 보이는, 수직적 시선을 수평적 요소로 거스르는 그 외관일테지만,
어떻게 보면 자연에 도전하고 지배하는 듯한 그 외관이 재료의 선택(암벽위에 지어진 굴뚝과 난로 부분은 자연석으로 만들어짐)과
자연광의 배치, 계절적 변화를 감안한 설계, 부드러운 콘크리트로 된 평행면을 자연속으로 침투시켜 계곡 속의 작은 다리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등으로 자연친화적인 건물의 정수로 꼽히고 있습니다.
한옥의 반가 어느 굴뚝보다 매우 낮은 높이의 굴뚝입니다. 실제높이가 45cm 정도예요. 독특한 형태죠?
생활이 어려운 서민들이 양반들의 집에서 굴뚝에 연기가 피어 오르는 모습을 보며 위화감을 느끼지나 않을까 하는 배려에서
굴뚝 높이를 대폭 낮춘 구조로 시공되었다고 합니다.
고목에 이끼가 끼어 있고 고목을 받치는 보호목을 설치한 모습에서 세월의 연륜이 느껴집니다.
남간정사 내부에서 정원을 바라다 본 모습.
이 위치에서 "머름"에 팔을 기대고 정원을 내려다 보는 정경이 아름다운데요(언젠가 이 위치에서 정원을 내려다 본 적이 있거든요)
남간정사를 방문하던 날, 이 남간정사 창호문에 한지를 바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다소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런 여유를 누리겠다는 말을 할 수 없고, 마음속으로만 정원을 내려다 보는 그림을 그려보았지요.
남간정사의 뒤뜰에 있는 우물. 이 물이 넘쳐 흘러내려 시내를 이루고 남간정사 밑을 통과하는 냇물의 발원지가 되는 우물입니다.
이 물은 남간정사를 통과하여 앞뜰 정원의 연못으로 흘러내리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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