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미술관
이응노미술관은 자연과 인간,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하나로 아우른
고암 이응노 하백의 예술과 작가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만큼 건축에서도 이러한 미술관의 설립 목표를 최대한 시각적으로 구현해 내기 위해 노력했다.
고암 이응노의 <문자 추상>을 모티브로 한 건축은 전체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고암의 이상을 최대한 살릴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첫째, 천정과 전면 전체를 투명 유리로 하여, 건축의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며,
낮과 밤에 따른 빛의 변화는 물론이고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도 내부에서 느낄수 있다.
미술관 안과 밖이 빛으로 연결되기때문에, 단절되고 고립된 공간이 아니라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친숙하고 편안한 공간이다.
둘째, 현란한 공간 구성이나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한 채, 전통 한옥의 처마에서 영감을 얻은 반복적인 선을 조형요소로 활용하여,
단아하고 정갈한 공간의 미학을 보여준다. 각 전시실을 잇는 통로는 마치 산책로처럼 꾸며져 "현대미술을 위한 사원"을
염두에 두었다는 건축가의 말처럼 고암의 예술에 빠져 깊은 사색과 명상을 즐길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 Laurent Beaudouin은
1955년 프랑스 낭시에서 태어나 국립낭시건축대학과 미국 뉴욕 쿠퍼 유니온대학을 졸업하였으며,
현재 낭시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Emmanuelle & Laurent Beaudouin 건축 설계 사무소를운영하고 있다.
아브르미술관(1988), 낭시미술관(1999) 등의 작품을 통해서 '빛'의 매력을 잘 살리는 건축가로 평가받아왔으며,
특히 카토 캉브레의 마티스미술관(2002)에서 18세기 건물을 투명한 유리로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현대적인 미술관으로 변모시켜 호평받은바 있다.
"나는 특히 한국의 민족적인 추상화를 개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동양화에서 선線, 한자나
한글에서의 선, 삶과 움직임에서 출발하여 공간구성과의 조화로운 나의 화풍을 발전시켰지요.
한국의 민족성은 특이합니다.
즉, 소박. 깨끗. 고상하면서 세련된 율동과 기백 -
이같은 나의 민족관에서 특히 유럽을 제압하는 기백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그림입니다."
(이응노, 1972, <중앙일보> )
이미 동양화의 한문자 체계가 지니고 있는 서예적 추상은
그 자원字原이 자연사물의 형태를 빌린 것과음과 뜻을 형태로 표현한 것이니 한자 자체가 바로 동양의 추상화적 바탕이 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형태의 아름다움이 무형의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일때,
'무형이 유형'이라는 동양의 철학적인 언어가 발생되며, 그것이 바로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그림의 구상이다.
글씨가 아닌 획과 점이 무형의 공간에서 자유자재로 구성해 나가는 무형의 발언이다.
몇 가지 덧붙인다면 내가 빌려 표현하는 자연 물질과의 융화는 또한 나의 생명인 예술의 반려자이다."
(이응노, 1976, 신세계미술관 개인전 서문)
군상. 한지에 수묵. 181cmX91cm. 1987
"나의 그림은 추상적 표현이었으나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이 있은 뒤로 사람들에게 호소되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왔다.
2백호의 화면에 수천명의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 넣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데모라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반핵 운동으로 보았지만,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 준 것이었다...........(이응노, 1986)
고암顧庵 이응노(1904-1989)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대하여
이응노는 충남 홍성을 떠나 서울에 상경하여 당시 서예와 묵화로 이름 높았던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 입문하면서 화가의 길을 시작했다.
스승의 집에 기거하며 묵화를 기본으로한 호방한 묵죽화를 지도받은지 3개월만인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청죽>이라는 작품으로 입선을 했다.
그 이후에도 묵죽화와 묵란화로 조선미술전랍회에 계속 입선하게 되지만, 1938년 일본유학을 떠나는 결단을 강행한다.
동경에 정착한 고암은 종전의 묵화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풍경화 작업을 지향하며 사실주의적 탐구를 지속한다.
지속적으로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하고 여러 전람회에 참가하다가 1945년 서울로 돌아왔다.
해방후, 당시 결성되었던 조선미술건설본부의 회원이 되어 그해 10월 덕수궁에서 열린 해방기념종합미술전에 출품했다.
이 시기에는 자연의 사실을기초로 하여 그것을 사의적寫意的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그 표현이 역동적이며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는 반反추상적 경향이었다.
당시의 한국 화단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으로 이러한 역량을 인정받아 1948년 홍익대학 미술학부 창설을맞아 동양화과 주임교수로 임명되었다.
고암은 1958년 도불을 앞두고 고암 이응노화백 도불기념전을 열었는데, 이때의작품은 반半추상 표현의 사의화寫意化라 볼 수 있다.
파리에서의 작품 생활은 1960년을 기점으로 출발되고 있다.
파리에서는 생활이 어려워 작품 제작할 재료마저 없어서
뜰에 버려진 낡은 잡지를 주워 물감 대신 캔버스에 뜯어 붙였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하게도 고암 예술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해주는 콜라쥬를 낳게 하였다.
1965년에는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받는 등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67년 동베를린 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그는 3백여 점의 작품을 제작하는 초인적인능력을 보여주었다.
출옥후, 1969년 파리로 돌아간 고암은
한지와 수묵이라는 동양화 매체를 사용해 스스로 '서예적 추상'이라고 이름붙인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하였다.
문자 추상의 이미지는 고대 상형문자를 연상시키지만, 한편으로는 풍경이나,동물, 사람으로 읽히기도 한다.
자연과 인간의 움직임을 흔적으로 기록한 일종의 문자로도 볼 수 있는 서예추상은 70년대문자추상과 80년대의 군상 연작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는 1989년 꿈에 그리던 고국에서의 초대전을 앞두고 파리에서 급서,
쇼팽, 마리아 칼라스 등 예술의 대가들이 묻힌 파리 시립 페르 라세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It's DaeJe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의 성터, 공산성 (0) | 2008.03.02 |
---|---|
"기품"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정림사지5층석탑 (0) | 2008.03.01 |
노은선사박물관에서.... (0) | 2007.07.20 |
대전문화예술의전당 DaeJeon Culture & Arts Center (0) | 2007.04.16 |
POWER CNU, MY CNU (0) | 2007.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