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윤편집회사대표 김형윤, "고향의 달"
"마침 부산에 가려는 날이 정월 대보름이었다. 고향의 달을 보겠구나, 그래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가는 길에 오랫만에 달집 태우기를 구경하기로 마음 먹었다. 달집을 어디에서 볼까? 당장에 인터넷을 뒤졌다. 해운대도 하고, 송도도 하고, 다대포도 하고,
여러군데서 달집을 태울 예정이었다. 구청마다 경쟁하듯 대보름잔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북구에서 마련하는 덕천동 낙동강변의 달집을 선택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기억이다. 우리집이 초량에서 서대신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학교도 자연히 전학을 했다. 새 학교니까 여러가지 풍경이 다를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차례를 정해 싸움을 붙이는 것도 그 하나였다.
"니가 절마한테 으이 나한테도 진 기야."
나는 서너번의 결투를 거쳐 순위가 정해졌다. 아마도 반에서 꼴등이었던 것 같다. 내 몸집을 꼴등은 아닌데, 전투력은 최하위로 판명났다. 나는 거기에 순응했다.
꼴등이라고 해서 특별히 왕따를 시키거나 하는건 없었다. 그 시절은 그랬다. 새 학교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다른데 있었다. 작았지만 내게는 강렬했다.
교실 뒷벽에 붙여둔 학생들의 그림 중에 달을 보며 절을 하는 아이의 모습이 있었다. 달앞에서 절을 하다니,,,
그때까지 나는 사람이 달한테 절한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부모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 그런 문화를 접할 기회가 자연히 없었다.
동네에서 달집 태우는 광경은 봤었다. 시커먼 연기를 앞세우고 붉은 불길이 뜨거운 바람을 뿜으며 하늘로 치솟았다. 거기에 비해 깡통에 불을 담아 빙빙 돌리는 것은
논두렁을 따라 작은 불씨들이 별들처럼 반짝거리며 퍼져나가는 풍경도 가슴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절을 하는 장면은 눈에 들어오지않았던 것 같다.
나는 지나간 옛 풍경들을 한꺼번에 떠올리며 기차를 탔다. 나는 재수가 좋은 사람 축에 끼지 못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대개 그러하였으니,
출발 전날 일기 예보가 말해 주었다. 이번 정월 대보름에는 달이 없다고, 대신 비가 내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설령 비가 온다고 달집을 못 태우진 않을 것이었다.
달을 못 보는 것은 용서하기로 정했다.
부산역에 내렸을때 역시 나는 재수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흐린 하늘은 예상했지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경상도 쪽은 밤늦게 조금만 뿌릴 것이라고
예보했었는데, 낮부터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역 문턱에 진을 치고 기다리던 우산 장수한테 5천원을 주고 우산을 샀다.
동네 청년들끼리 작당을 해서 달집을 태우는 마을이 나라 안 어디에 아직 한 곳이라도 남아 있을까? 요즘 보름맞이 같은 민속은 구청 같은 지방자치단체가 이어가고 있다.
옛날에 그것은 '놀이'였지만 '행사'가 되었다. 입구에서 해병대전우회 회원들이 길 안내를 하고, 경찰들이 교통정리를 한다. 적십자회나 부녀회에서 나온 여성들이
차일 밑에서 커피를 대접하고 떡국을 만들 물을 끓인다. 청년회 회원들이 농악대를 조직하여 흰옷을 입고 고깔을 쓰고 줄을 지어 서 있다. 불을 붙이는 장소니까
곁에는 소방차가 대기하고 있다. 아마 이날 같은 시각 전국 방방곡곡에서 같은 풍경들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사방은 어느새 강렬한 어둠 속에 갇혔다.
그러나 꺼져가는 듯 싶다가도 탁탁 소리를 내며 되살아난 불꽃들이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그때마다 무성한 억새밭 위로 강물의 늠실거리는 검은 살갗이 눈에
들어온다. 낙동강변에 이른 내가 어느 정도 이런 풍경을 기대했다고 해서 비웃을까? 나는 보름달은 못 보더라도 잠시나마 어린 시절의 아득한 어둠 속에 갇히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것들은 너무나 상상과 달랐다. 사방은 아직 훤했고, 그 훤한 하늘 아래 강물은 아주 멀리 떨어져 희부옇게 엎드려 있었다.
달집은 달 뜨는 시각에 맞추어 오후 4시 26분에 불을 붙인다고 했다.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잔뜩 흐렸다. 그러나 하늘이 마음이 변해 갑자기 맑아진다고 해도
보름달이 보일 시각은 아니었다. 관에서 하는 행사이므로 정해진 시간에 시작해서 정해진 시간에 불이 안전하게 꺼져야 한다. 그래야 구청 직원도, 경찰도,
소방관도 정해진 시간에 퇴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달집에 달이 붙었다.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 아래 강을 가로지르는 우람한 다리들 사이,
지저분한 공터에서 달집이 타기 시작했다. 흰 연기가 공중 높이 올라갔고 불길은 땅 위에서 어깻짓을 했다. 그곳에 불씨를 깡통에 담아 어둠 속에 휘휘돌리는
쥐불놀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불을 놓을 논두렁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농악대가 열심히 꽹과리를 치고 장구를 두드리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나이든 여인들이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그들만이 그나마 사라진 옛 풍경들을 재현하고 있었다.
나는 좀더 허전한 마음을 안고 행사장을 떠났다. 스피커에서는 그냥 가시지들 말고 떡국 한 그릇씩 들고 가시라고 붙잡았지만 아직 배가 고플 시간은 아니었다.
나는 묵묵히 사람들 사이를 벗어났다. 그러나 왜 이렇게 밖에 못하냐, 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냐, 이런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관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디가서 달집 비슷한 것이라도 볼 수 있으랴. 그런 마음이었다. 환하게 뜬 보름달이 없는 정월 대보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출처: 부산일보 2012. 02. 18. 23면 토요에세이에 실린 김형윤의 "고향의 달"이라는 글.
김형윤은 "김형윤편집회사"의 대표(1984~ 현재), 에세이스트, 월간지 "뿌리깊은나무" 편집장 (1976~1980)
부산일보 토요에세이에 실렸던 김형윤대표의 이 에세이,,,,김형윤대표가 쓴 글이 맞을까,,,뿌리깊은나무 편집장 시절의 그 화려하고 매혹적인 글솜씨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일부러 이 에세이를 워드로 하나하나 쳐봤다. 1980년" 뿌리깊은나무"가 폐간되고, 몇년후에 김형윤 편집장은 "김형윤편집회사"를 설립했고, 그 이후로 현재까지
김형윤편집회사를 운영중이고 김형윤편집회사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편집 문화를 이끌어오고 있다. "뿌리깊은나무" 발행인은 우리 시대의 어르신, 영원한 선비 "한창기선생님"이셨다.
뿌리깊은나무의 기자였던 설호정이 그 몇년후에"샘이깊은물"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해서 편집장을 했던 적이 있다. 순 한글로 만든 여성월간갑지. 새초롬한 여성이
창간호 표지사진이었다. 흑백사진으로. 김명곤전국무총리는 이 "뿌리깊은나무", 김형윤선생 휘하에서 잡지기자로 1년 근무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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