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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갈매못 카톨릭 순교지 문화재 지정

안젤라Angella 2013. 2. 16. 06:00

보령 갈매못 카톨릭 순교지 문화재 지정

 

 

 

1866년 천주교 박해 당시 프랑스인 다블뤼 주교 등에 대해 효수형이 집행되었던 장소로 서해안의 대표적 카톨릭 순교지인 "보령 갈매못

 

카톨릭 순교지"가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번에 지정된 보령 갈매못 카톨릭 순교지는 1866년 3월 23일 천주교 병인박해때, 서울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보령에 있는 충청수영으로 이송된 다섯 성인(성 다블뤼 안토니오, 성 오메트르 베드로, 성 위앵 마르티노, 성 황석두 루가, 성 장주기 요셉)이

 

1866년 3월 30일 수영 근처의 바닷가 모래 사장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한 장소로 현재 순교자기념비,사제관, 수녀원 등이 건립되어 있다. 

 

 갈매못 성지는 충청남도 보령시 영보면 오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갈매못 성지는 역사적으로 병인박해(1866년)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송되어 순교한 곳일뿐만 아니라,

 

다블뤼 주교의 유품과 유물이 소장되어 있는곳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는 성지이다.   이곳은 1925년 최말구신부 등이 현지확인을 통해 발견하였으며,

 

1927년부터 성지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1975년에 순교터에 다섯 성인의 순교 기념비와 야외 제단이, 1999년 순교기념관이, 2007년에는 대성당이 건립되어

 

순교자들을 맞고 있다.특히 자연환경적으로 천주교 성지중 유일하게 바닷가에 위치한 성지로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나 매년 4만~5만명의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갈매못 성지 인근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충청수영성이 있으며, 도미부인 사당, 이지암선생의 묘등 역사, 문화, 종교가 연계될 수 있어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될 것으로 기대가 된다. 

 

 

 

 

갈매못 성지 오명관 베네딕도 신부는 "보령 갈매못 카톨릭 순례지가 도지정 문화재가 됨에 따라 역사, 문화, 종교의 통합적인 교의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라며 "주변 역사 문화 자원과 연계, 성지 관광 순례코스로 개발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Marie Antonie Nicolas) 주교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Amien)의 다블뤼 집안에서 태어나 1841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전교신부로서의 뜻을 펼치기위해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교하여 이듬해 극동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2월 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를 출발하여 8월 24일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한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J. Ferreol) 주교의 간청을 받고 조선 선교를 지원하였다.

 

1845년 8월 17일 금가항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 안드레아의 사제서품식에 참석한뒤 8월 24일 첫미사를 집전한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1846년 1월부터는 공동주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고, 점차 더 먼 곳에 있는 신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김대건신부는 1846년 6월 5일

 

순위도에서 붙잡혀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김신부 체포소식을 들은 다블뤼 주교는 페레올주교와 함께 피신하여 큰 고초를 치렀고, 11월 2일

 

수리치골에 도착한 후에는 몇몇 신자들을 모아 신심단체인 "성모 신심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겪은 고생으로 그는 1847년 봄에 중병을 앓았고, 오른쪽 무릎

 

인대가 늘어나 평생동안 보행에 지장을 겪어야만 했다.  또 1850년 1월에는 중병으로 인해 최양업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수년동안 순회 전교를 하지 못한채

 

소년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다블뤼 주교는 1856년 3월 우리 조선에 입국한 제 4대 조선 교구장 베르뇌주교로부터 1857년 3월 25일, 서울에서

 

계승권을 가진 보좌주교로 서품되었다.  한편 그는 1856년부터 조선 교회사및 조선 순교사 사료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하였으며, 신입 교우들을 위한

 

교리서도 편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푸르티에(Porthie)에 신부 등이 해오던 사전 편찬 작업을 이어받았는데, 이 사전은 1866년 병인박해후 선교사들에 의해

 

보완되어 "나선소사전"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그후 다블뤼 주교는 1861년 6월 15일 최양업신부가 문경에서 병사하자 최신부가 활동하던 경상도 남부지역을

 

떠맡았다.  그리고 1862년에는 그동안 수집정리해 온 조선 교회사및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알브랑에게 보냈다.

 

이 자료들이 바로 "다블뤼 비망기(Fran ois Artonie Albrand)" 라고 불리는 것으로 딜레(Ch. Dalleh) 신부는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1874년에 "한국천주교회사(HIstorie de I'Englise de Cor'e)"를 간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1863년 봄에 다블루 주교가 내포평야에서 전교를 하고 있던 중

 

주교댁에 이웃집 화재가 옮겨 붙어 가산과 남은 한국자료들은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다블뤼 주교의 저서와 역서로는 "영세대의" "성찰기락" "다블뤼 주교 비망기" "조선 순교사 비망기" "신명초행" "회죄직지" "선교 요리 문답"

 

"천주 성교 예규"등이 있다.  다블뤼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거더리에서 체포되었고, 이튿날에는 위앵신부와 오메트르 신부가 자수하여 그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두 차례의 신문을 받은 후에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1866년 3월 30일 충청도 수영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로오 6세에 위해 복자품에 오르고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에서 고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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