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통 커뮤니케이션 리서치 센터 파브리카의 도서관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가고 꽃 피는 봄이 찾아온다. 신입생들은 부푼 가슴을 안고 강의실로 향하지만 그 자리를 내주고
사회로 나아가야 할 졸업생들의 마음은 사뭇 다르다. 그나마 바늘 구멍 같은 취업의 문을 관통한 사회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 테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4년간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막대한 등록금을 떠올리며 이른바 공채 시즌에 뛰어들어야 한다.
봄을 맞은 캠퍼스는 신입생들의 환희와 졸업생들의 고뇌가 교차한다. 디자인을 전공한 학생들의 상황동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비" 디자이너들의 치열한 취업 전쟁을 바라볼 때면 마음이 편치 않다. 특히 우리나라 디자인 교육의 현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 디자인 교육은 현재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매년 반복되는 교육 방식, 제도의 문제, 등록금과 유학등
교육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들은 방황하는 한국 디자인 교육의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사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디자인이 지닌 독특한 속성에서 기인한다. 디자인은 실무인 동시에 이론이다. 이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아이디어 없이 손재주만 살아 있다면 그것은 화려한 빈 껍데기에 불과하고, 반대로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손이 야무지지 못하면
그것 역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디자인 교육은 어느 한 곳에만 초점을 맞출 수가 없다. 두 가지 모두를 두루
갖춘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디자인의 방황을 부추기는 데에는 제도적 문제도 한몫한다.
대부분의 디자인학과들은 광범위한 디자인 영역을 압축시켜 소화하려고 한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지나치게 모든 것을
잘하려고 한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시각디자인학과를 예로 들어보자. 이 분야는 워낙 범주 자체가 방대하기
때문에 시각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시각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등 학과의 명칭마저 제각각이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디자인 교육의 정체성 혼란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현재 많은 시각디자인학과 안에는 디지털과 그래픽 등 다양한 수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디. 시각 디자인이라는 넓은 범주로 묶여 있지만, 사실 이 영역들은 개념적, 기술적으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졸업생들의 진로 역시 확연히 구분된다. 이것은 변호사와 검사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의사와 상담사 정도의 심각한
간극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많은 디자인 학교에서 이런 수업들이 "뭉뚱그려" 진행된다. 다양한 영역을 두루 배울 수 있는
것이 대학의 강점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깊이의 문제가 아닐까?
다양한 세부 분야를 섭렵한다고 하지만 이 세부 영역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학생은 많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디자인 기술은 시간이나 시설 면에서 상당히 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서체 디자인,
인쇄술, 혹은 프로그래밍이나 코딩 같은 기술은 주당 3~4 시간씩 진행하는 수업으로는 충분히 습득할 수 없는 것들이다.
결과적으로는 학생들은 4년 내내 심화 과정 없이 맛보기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매년 업데이트되어 출시되는 디자인
프로그램을 쫒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비단 기술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대학의 정규 4년 과정을 마쳤음에도 디자인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과 관점을 갖지 못하는 학생도 수두룩하다.
이것은 기술적인 문제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며, 학생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대학들이 이런 문제를
좌시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학교마다 워크숍 개설, 동아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 정도 노력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이고, 아마 많은 디자인 교육자들이 통감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교수와 강사들은 학교와의 협의를 거쳐 더 나은 교육 과정을 만들기도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제 3의 디자인 교육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각자의 교육 철학을 갖고
다양한 형태의 학교를 설립, 운영한다. 우선 기업에서 후원하는 학교들이 있다. 기업들은 각자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직접 학교를 세웠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 베테통이 후원하는 파브리카(Fabrica)는 다양한 글로벌
프로젝트로 전 세계 디자인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내에서도 디자인 양성을 위해 노력중이다. 삼성이 설립한
디자인 학교 사디와 디자인 전문 기업 아메바의 아메바 UX 아카데미에서는 철저히 실무를 반영한 교육을 실시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디자인을 넘어 삶을 공유하는 학교들도 있다. 도제식 교육을 현대식으로 발전시킨 파티와 작가 공동체 힐스는
교육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타이포그래피의 DNA까지 만지는 히읗학원이나 인문학과 디자인의 통섭을
꾀하는 정병규학교 역시 새로운 디자인 교육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만든다. 우리가 만난 학교들은 결코 완벽한 대안도,
완벽한 정답도 아니다. 이들도 대학의 디자인 교육 만큼이나 많은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심중이다.
하지만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각자의 철학과 신념으로 다양한 디지인 교육을 시도하고 있는이들 학교의 노력이 교육자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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