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나는 지도에도 없는 시베리아 대평원에서 길을 잃었고, 세 시간을 헤맨 끝에 결국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워낙 희고 건장한 모습이어서 십 리 밖 멀리서도 웅성대면서 서 있거나 아우성치며 멀리서도 웅성대며 서 있거나
아우성치며 달려들 것 같은 환각이 일어났다. 시베리아의 밋밋한 둔덕을 넘어서자 그들이 갑자기 환영처럼 나타났던 것이다.
수백만 그루의 자작나무 숲이었다. 거기에 쉬엄쉬엄 빗금치듯 한참 싸라기눈이 쏟아지고 이제는 그마저도 흰색 캔버스에
묻힐 때쯤 돌연히 수만 마리의 순록 떼가 나타났다. 장관이었다. 말을 할래야 할 수 없는 절대 정적.
나는 넋을 잃고, 그야말로 경이로운 절대자의 거룩한 작품을 보면서 한나절을 거기 그렇게 망연히 서 있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가장 강렬하게 느낀 초현실적이면서도 리얼하게 디자인된 작품이었다. 자작나무 숲에서 나와 베링 해 앞에
섰을 때는 더한 광경에 부딪혔다. 빙하와 빙해의 바다가 만들어 놓은 대책없는 풍경이었다. 무질서하게, 미처 재단되지 않은
디자인된 모습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은 일망무제(一望無際), 그러나 그것도 자세히 보니 바다쪽으로 몸을 밀어내며,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며 가장자리를 잘라가면서까지 빙하의 중심을 지키려는 빙하의 장엄한 죽음이 거기 있었다.
그것은 내적 디자인이었다. 수천만년을 갈고, 깎고, 덧붙이고, 소멸하면서 그 위에 인류를 키워온 거대 진행형 디자인이었다.
인류는 바로 빙하가 떠돌던 와중에 생겨났고, 빙하와 함께 행진해 온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어찌보면 인간은 빙하가
소멸의 디자인 과정에서 뱉어내는 눈 부스러기이고 그보다 더 연약한 존재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처럼 영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자 하는 부류들은 대체로 디자인, 또는 디자인 적인 것을 구성, 미장센, 신, 시퀀스 등으로
환치하여 부르는 편이다. 영상은 기획에서부터 촬영, 편집, 믹싱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군데 디자인되지 않는 곳이 없다.
장면과 현장 음은 정교하게 선택되어 결합되고 각 기능이 제자리를 찾아야 좋은 작품으로 남는다는 진리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는 디자인을 산업적 개념이 아니라 생태적 또는 생명의 흐름, 스토리 속에 내재한 플롯과
성격의 지도, 즉 이미지맵으로 파악하길 좋아한다.
대체로 거시적이거나 아니면 반대적 미시적인 모습으로 순수 예술 사이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아마 예술 쪽에 가까운
실용적인 것과는조금 거리가 있는 셈이다. 어찌 보면 겉에 드러난 형체의 디자인 보다는 그 속에 내재된 본질을 더 보고 싶어 한다.
결국 머리 속과 마음이 흘러가며남긴 흔적의 지도를 보는 셈인데 보고, 듣고, 느낀 것의 총체적 표현이 곧 영상 디자인으로 나타난다고
인식하고 또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그것은 특히 휴먼 다큐멘타리나 역사 다큐멘타리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데, 휴먼 다큐멘타리의 경우
인간의 사소한 마음의 흔들림은 물론이고 격한 감정의 파도는 마음의 필터를 거치고 머릿속에서 디자인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감동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역사 다큐멘타리는 아예 처음부터역사적 사실이라는 팩트로 디자인되어 있고 그것을 다시 분류, 분석하여
재해석과 의미 부여로 디자인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영상은 디자인 밖의 디자인이다.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디자인이고 사무실과 일상, 도시, 전쟁터, 영화 속 캐릭터,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는 것이 디자인임이 분명하지만, 디자인은 이미 머릿속에서 출발할 때부터 그 생명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마치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타이가의 자작나무 숲에서 한 그루 자작나무가 일생의 긴 흔적을 이끌고 마침내 "나무의 여행"을 끝마치는
베링해 하구에오기까지, 그가 머무는 곳마다 그 디자인적인 삶을 완성해왔듯이 디자인은 삶을 완성해왔듯이 디자인은
늘 그렇게 순간마다 완성되고 소멸되는 생명체가 아닐까?
이 봄이 온전히 다가오기 전, 얌전하게 디자인된 공예품이나 날마다 팔색조처럼 바뀌는 전자 제품의 디자인처럼 복잡하고
무수한 디자인의 홍수 속에서 멀리 떠나와 이제는 변하는 듯 변하지 않는,
한 폭의 광막한 시베리아가 만든 생명의 디자인을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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