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道山書院)은 광해군때 예조화랑을 지낸 23세 만회 권득기(晩悔 權得己, 1570~1622)선생과 그의 아들로
현종대 한성부 우윤을 지내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도학을 강론하던 24세 탄옹 권시(炭翁 權諡, 1604~1672) 선생 두 분의 학문과
학덕을 기리고,이들 부자를 제사지내며 강학하는 곳으로 삼고자 1692년 (숙종 18년) 탄방동 도산(道山) 기슭에 세워졌다.
본래 탄방동은 탄옹 권시 선생께서 후학들을 위해 10여년간 강론한 강학소(여택제)가 있었던 곳으로 명재 윤증(尹拯)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이 서원에서 배출되었다. 원래는 두 분을 충현서원에 배향하려는노력이 있었으나"시의와 다른 예론을 주장하고
윤선도를 변호해 주다 당인의 미움을 받아 종신토록 곤액을 받았으니(예판 홍우원)"와같이 당인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다가
지역 문인들에 의해 건립되고, 일시 남인 정권에서 사액이 결정되기도 하였으나 바로 서인 정권이 들어서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1868년(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1871년에 철폐되었는데, 당시 충청감사가 도산서원 사림도사 권영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산서원은 훼철 대상에서 빠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사액서원은 아닐지라도 대원군에 의해
나라에 계속 存秋의 서원으로 규정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귀중한 서원으로 공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함덕사 앞으로는 광무 8년(1904년)에 세운 "도산서원 사적비"가 있다.
1921년 기성사인 이시채의 발의로 매판소에 설단하고 춘추향례를 봉행하다가 안동권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문공부의 협조를 받아 1968년 옛 서원이 자리했던 동편 언덕에 함덕사(涵德祠)를, 이어 1973년 서원을 다시 건립하였다.
도산서원 전경, 서원은 윗 구역에 유정문, 묘우인 함덕사가 있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위패를 봉헌하였으며, 창호는
중앙은 사분합, 양 옆에는 삼분합 정자살문을 달았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아래 구역에는 "향직문" 현판의 대문과
강당과 동양재, 서양재를 지었다. 인좌신향(寅座申向)으로 배치된 강당에는 "도산서원"의 편액을 걸었다.
강당 정면 우측에는 탄옹선생께서 9세에 지은 그림자시가 있고 양 옆 벽면으로는 만회 권득기 선생의 십자훈이 만회를 존경하던
미수 허목의 친필 전자로 새긴 전각 목판이 있다. 강당 앞 좌우에는 원생들이 숙식하던 재실이 있는데, 동재에는 "시습재",
서재에는 "지선재"의 현판이 있다. 건물은 모두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인좌신향의 배치이다. 강당과 합덕사 사이에는
재물을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고, 서원 뒤 쪽에는 산소를 돌보는 재실로 경모재가 있어 서원의 고직사를 겸하고 있다.
도산서원 명교당, 명교당 내부 좌측과 우측 벽엔 위 사진 첫번째의 만회공 가훈 편액이 걸려져 있다.
만회공 가훈이 적힌 이 편액은 시원시원한 전서체로 쓰여져 있고, 미수 허목의 친필이다.
이 매력적인 글씨를 한참동안이나 들여다 보았다는.
"昧事泌求是(매사필구시); 모든 일은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고
無落第二義(무락제이의); 의롭지 않은 일에 빠지지 말라"
탄옹 권시선생이 9살때 지은 그림자 시(時), 도산서원 명교당에 이 시를 적은 편액이 있다.
"一步動時爾已隨; 한걸음 움직일때마다 네가 이미 따랐으니
微心去處爾應知; 작은 마음 가는 곳도 네가 응당 알았으리
悲歡憂樂爾爲伴; 슬픔과 기쁨, 근심과 즐거움에 네가 짝(동무) 하니
曲直正邪爾作師; 굽고 곧고 바르고 삐뚫음에도 네가 스승이 되리로다"
명교당 상량문과 대들보, 그리고 도산서원 명교당의 연혁을 적어 놓은 편액.
올 봄 도산서원 춘향제를 진행한 인원들의 명단, 추향제는 오는 10월 19일 도산서원에서 진행된다고 한다. 초헌관에 노재헌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혹시 그 분이 예전에 장관을 지낸 그 분이냐고 여쭤봤더니 그 분은 아니고 동명이인인 다른 분이라고 한다.
도산서원 지선재, 명교당의 우측에 있다는.
* 권시(權諡), 1604년(선조 37)~1672년 (헌종 13.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학자로 호는 탄옹(炭翁)이다.
아버님은 좌랑 득기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도정 첨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행이 절이하여 사람들이
인자에 비유하였다. 9세때 이미 훌륭한 시(그림자 시)를 지었으며, 15세에 이기지설과 사칠지변에 정통하였다.
1636년(인조14년)에 대군사부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선릉참봉, 세자시강원자의 등 여러 차례 벼술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공조좌랑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경상도사 등을 역임하였고
그 뒤 집의 진선 등을 거쳐 1658년(효종9년) 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찬선에 오르고 1659년 현종이 즉위한 뒤에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예송문제가 있을때 송시열과 송준길에 대립하여 위기에 놓인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되어 낙향하던 중 광주의 선영에 머물러 있다가 이곳 탄방으로 낙향하여 살았다.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로서 예론에 밝았으나 남인이나 소론과도 넓게 교류하였다.
지선재에서 바라본 도산서원 명교당
* 권득기(權得己), 1570년 (선조3년)~1622년(광해군 14년),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지, 호는 만회이다.
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묘서령 덕유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극례이며 어머니는 윤천석의 딸이다.
작은아버지인 선고감역 극관에게 입양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0년(광해군 2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광해군이 모후를 서궁에 유페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정치가 혼란하여지자 관직을 버리고 야인생활을 하였다. 죽은 뒤 공조참판이 추증되고, 저서로는 "만회집" "연송잡기" 등이
있다. 태안에 은거하면서 도학과 도의를 연마하며, 후손들에게 학문의 목적을 과거 시험에 두지 말라며 "모든 일은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고 의롭지 못한 일에 빠지지 말라" 라는 십자훈인 가훈을 남겼다.
도산서원 좌측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유정문이 있으며, 문의 정면에 가로 3칸, 세로 3칸으로 된 함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사우와 명교당 사이의 언덕에는 전사청이 있다.
안동권씨 탄옹공파에서 춘향제, 추향제를 모시는 장소, 올해 춘향제는 봄에 이미 지냈고, 추향제는 오는 10월 19일에 모신다고 한다.
안동권씨 탄옹공파 후손들뿐만 아니라 일반시민도 참여해도 좋다고 하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오는 10얼의 추향제에 참석해 보는 것도 좋을듯.
도산서원 정문 방향에서 바라본 도산서원
가까이서 들여다본 도산서원 정문, 우직하지만 간결하고 검약한 느낌을 준다는.
도산서당, 안동권씨 탄옹권파 집안의 어린이들이 글을 배웟다는 서당. 안동권씨 탄옹공파 종택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는.
안동권씨 탄옹공파의 종가(宗家), 현재 후손이 생활하고 있다. 도산서당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는.
숭모각(崇慕閣), 유형문화재 제17호(1989년 12월 12일 지정), 炭翁祖 묘 일원에 위치한 숭모각은 만회 선생 문집이 새겨진
판목(板木) 328판과탄옹 선생 문집 판목 292판이 보관되고 있는 장판고이다. "만회집" 판목은 매탄 선생의 장자인 함창공이
1635년(인조 13년), 증손자인 유회당 권이진이1712년(숙종 38)에 각각 제작하였으며, 판재는 배나무와 물오리나무를 사용하였고,
탄옹 선생 문집인 "탄옹집" 판목은 장자인 무수옹 권기가 제작하였으며,판재는 배나무와 물오리나무를 사용하였다.
이들 판목은 당초 도산서원에 보관되다가 서원 철폫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유회당 건물 경내에 있는장판각에 유회당 권희진 문집
판목과 같이 보존되었다가, 1987년 안동권씨 탄옹공파 종중에서 숭모각이 세워진 후 다시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숭모각 내부에 있는 장판각 현판, 만회선생 문집판목 328판과 탄옹선생 문집 목판 282판이 보존되고 있는 장판고이다.
이 장판각 자물쇠를 열기 까지는 3개의 자물쇠를 열고 통과해야 했으니 권시 선생의 목판본을 직접 만나는 순간이다.
숭모각 장판각 내부, 만회선생 문집판목 328판과 탄옹선생 문집 목판 282판이 보존되고 있는 장판고이다.
안내하시던 안동권씨 탄옹공파 11대손 어르신이 장판각 문을 열어주셔서(장판각 문을 열기까지는 4개의 자물통을 열어야 했다는)
직접 안에 들어가서 목판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참나무 재질로 만든 목판에 꼼꼼하게 새긴글씨가 인상적이었다는.
목판의 보존상태는 좋은 편이었는데, 이 목판에 직접 먹을 발라 한지로 한 번 찍어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숭모각 전경, 숭모각에서는 도산서원과 도산서당, 그리고 안동권씨 탄옹공파 종택이 내려다 보인다.
탄옹선생 문집 목판본중 일부를 클로즈업한 것. 목판을 사진 찍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안내해주시던 분이 직접 목판 하나를 꺼내어 보여주셔서
사진 촬영한 것. 목판을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탄옹선생 10대손 어르신께서 목판을 안아 들고 계시고 그 상태에서 목판을 찍은 사진.
숭모각의 평살무늬문과 단청, 간결한 느낌이었다는.
탄옹공 권시선생 묘소, 문화재 자료 제51호(2008년 3월 18일 지정),
탄옹선생은 원래 보문산 남쪽 산록 사정 한림계곡에 묻혔다가 안장한지28년 뒤인 1700년(숙종 경진년 26)에 유택을 탄방
산등성이로 옮기니 간좌이다. 1869년 고종 기사년에 탄방동 서원의 옛 터로다시 옮겨 모시니 축좌(미향, 남서향)로 지금 자리이다.
묘가 위치한 곳은 개발 이전에는 도산서원이 소재한 남산과 연결된 얕은 구릉이었다.솔밭을 병풍처럼 두른 묘 앞은
대전의 중심지역으로 널리 시야가 트여있다.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양쪽으로 망주석과 문인석이 있다.
망주석은 장식없는 단순한 사각기둥에 윗면만을 둥글게 처리해 일반적으로 윗부분이 연꽃봉우리형인 망주석과 달리
매우 간소하다. 1737년 세워진 묘 우측의 비석은 사위인 명재 윤증이 비문을 지었으며 근자에 새로 건립한 것으로,
좌측에는 원래의 비석으로 묘 옆에 매몰되었다가근자에 발굴하여 전대의 유물로 좌측에 세워 놓았다.
조선 중기 일반적인 양반가의 묘제를 잘 보여주는 묘이다.
1737년에 세원진 묘소 오른쪽의 비석, 탄옹선생의 사위인 명재 윤증선생이 비문을 지었다.
숭모각이 있는 언덕엔 소나무가 20~30 그루 자라고 있었는데, 정성들여 가꾼 흔적이 보였다는. 아마 수령이 100년은 넘을듯했다는.
부근엔 수령 3~10년쯤 되는 작은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만일을 대비해 작은소나무를 예비로 키우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도산서당 방향에서 찍은 도산서원의 측면. 사진 왼쪽 위치에 재실인 경모재(慶慕齎)가 있는데, 1934년에 건축되었고 도산서원의 강학공간과같은
인좌신향의 배치를 하고 있으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동측에는 조그만 전사청이 경모재를 향하고 있고, 경모재 앞에는 관리인이 거처하는 살림채가 있다.
도산서원은 승용차편으로는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220~1번지"로 네비게이션 찍으면 되구요, 도시철도편으로는 용문역 6번 출구에서
도보로 10분 혹은 602번 버스로 환승하면 도산서원앞 승강장에 하차하게 되요.
* 이 기사는 대전도시철도공사 SNS기자단 활동으로 제작한 컨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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