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정

너는 나의 계절이고 나는 너의 봄이기를,,,,,,,

아름다운 여정

안젤라가 만난 사람

장미505털실로 스웨터를 떠주시던, 은행나무집고모

안젤라Angella 2009. 2. 16. 18:26

505 실로 웨터 주시, 나무

 

 

우리는 고모를 "은행집고모"라고 불렀는데, 고모네 집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어서 였는지,

 

아니면 고모부가 은행지점장이셨기 때문이었는지는잘 모르겠다.  하얗고 고운 피부를 지녔던 고모는 긴머리를

 

위로 가지런하게 빗어올려 마치 새둥지처럼 모양을 내어 만든 머리모양을 즐겨 하셨다. 

 

 단아한 모습.  고모는 집안 친척이 되는 분이셨는데, 어른들끼리도 절친하고

 

고모가 날 특히 많이 예뻐하셔서 내겐 친고모 이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분이시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1학년 다니던 무렵,

 

학교수업을 마치고 란도셀을 메구 교문앞을 걸어 나올 무렵이면  고모가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한 사흘만 고모댁에 가지 않으면 고모가 그렇게

 

내 학교 앞으로 찾아오시곤 했다.  난 먼 발치에서 고모를 발견하면 좋아서 어쩔줄 모르구 와라락 달려가서 품에 안기곤 했다.

 

마당이 넓은 저택이었던 고모댁에는 넓은 마당엔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는 연못이 있었고 거기엔 돌로 만든 구름다리가 있었다.

 

연못엔 잉어가 여러 마리 살고 있었는데, 연못도 잉어도 금방 씻어 놓은듯 늘 정갈한 모습이었다.  고모가 학교에서 돌아올 날 기다리며

 

잉어들을 그렇게 목욕시켜 놓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붉은 벽돌로 만든 높은 담장이 있던 집, 담장가엔 아주 커다란 히말라야시다가

 

지붕보다도 훨씬 높게 여러 그루가 있었다.  그 옆엔 은행나무,,,,가을이면 은행나무는 황금빛으로 물들고 바람이 지나가면 은행알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곤 했다.  커다란 나무 대문을 열구 들어서면 문간채를 지나야 연못이 보였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대청마루가 있었고,,,,,미닫이문을 열면 방, 또 미닫이문을 열면 또 방, 또 미닫이문을 열면 또 방,,,,,

 

그러구나서야 대청마루가 보였다.  그 넓은 저택 방 많은 집을 고모는 반들반들 윤기나게 쓸고 다듬구 가꾸고 또 가꾸고 하셨다.

 

그 시절에 보기 드물게 실내에 수세식화장실까지 갖춘 집이었다.

 

 

 

 

우리집에서는 아버님께서 퇴근하시면 우당탕 퉁탕 뛰어나가서

 

안고 보듬고 뽀뽀하고 마치 삼년만에 부녀상봉 하는것처럼 야단스럽게 아버님을 반겼는데, 고모댁에서는 내 사촌들이 고모부 퇴근하시면

 

앞으루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정중하게 절을 하며 깍듯한 태도로 고모부를 맞이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사촌형제들이랑 나란히 서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있기도 했다.  엄마는 나와 몇 년 터울로 태어난 남동생에 빠져서 아무 생각이 없으셨던 거 같고난 집안의 온갖 귀여움과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남동생에게 관심을 빼앗긴 허전한 마음에 웬지 고모를 더 보챘던 거 같다.    고모에겐 네명의 아이들(사촌형제)이 있었는데,

 

언니둘, 오빠 둘,,,,모두 다 자라 고등학생 대학생이던 시절이었으니 고모은 어린 나를 더 귀여워하셨던 거 같다. 

 

고모와 난 얼굴이 닮아서 고모를 따라 어딜가면 막내딸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란도셀을 매구 고모네 집에 가서 놀다가

 

따뜻한 한지 방바닥 온돌에 녹아 스르르 잠이 들면 고모가 업어서 집에서 데려다 주곤 하셨다.  고모 등에 업혀서 느끼던 그 따뜻한 느낌,,,,,,,

 

내 아버님은 날 명문초등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셨고, 그 무렵 새로 집장만해서 이사간 우리집은 집은 크고 좋았지만 아버님께서 보내고자 하는

 

학교와 다른 학교 학군의 경계지점쯤 되었던 거 같으니 새학기에 학군 확인을 할 때면 난 명문초등학교 학군인 "은행나무집고모"집에

 

사는 것으로 말하기로 되어 있었다.  소풍날이면 고모가 아침 일찍 집에 오셔서 내 긴머리를 땋아서 리본을 예쁘게 묶어 주곤 하셨다.

 

솜씨가 얌전하셨던  고모는 뜨게질을 아주 잘하셨는데, 고모는 "장미505털실"로 뜨게질을 해서 내 스웨터며, 원피스며, 조끼며, 가디건이며,

 

모자, 머플러며,,, 털실로 뜰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주셨다. 내 어린시절 사진을 보면 유난히 니트를 입고 찍은 사진들이 많고

 

이 니트의 거의 대부분을 "은행나무집고모"가 만들어 주셨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쯤 될 무렵에 고모부께서 병환으로 앓아 누우셨고,

 

여러 차례의 대수술을 거치면서 고모는 고모부를 "종합병원 특실"에 모셔두고 단팥죽 장사를 시작하셨다.

 

은행장 사모님이었던 고모가 하루 아침에 단팥죽 장사라니,,,,

 

피부가 하얗고 얼굴이 갸름하고 단정한 기품있는 고모가 장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그 어두운 그림자를 보면서

 

난 웬지 내가 고모를 지켜야 할 것 같은 비장한(?) 마음이 들어서 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면 가방을 든 채로 고모네 가게로 가서 옆에서

 

고모를 거들겠다고 나서곤 했다.   고모는 당황해 하며 손사레를 치셨고, 엄마는  난처해 하셨지만,,,,,

 

고모부가 작고하신후, 고모가 그  큰 저택을 정리하고 조그만 집을 사서 이사를 하셨을때 그 슬픈 마음이란,,,,,

 

아버님께 우리집에서 고모네 가족이랑 같이 살자고 졸라 보기도 하구,

 

가끔 옛고모댁에 가서 그 커다란 대문과 은행나무, 히말라야시다 나무를 물끄러미 보고 오기두 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고모는 그 어려움을 지혜롭게 잘 대처하셨다.

 

사촌오라버니와 언니들이 모두 대학교수가 되고 교사가 되고 공기업체 직원으로 안정된 위치를 찾으면서 고모님의  여생도

 

다시 편안해지셨고, 고모는 이제 팔순을 앞둔 할머니가 되어, 용인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계신다.

  

고모님께  용돈을 드릴때면, 나는 누비비단지갑에 한국은행에서 새로 만든 새돈을 정성스럽고 얌전하게 담아서 드린다.

 

내 어렸을 적에 고모가 날 그렇게 정성껏 돌보아 주셨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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