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국제적 베스트셀러 작가"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은 허난설헌의 시詩를
보고 "빼어나면서도 화사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뼈대가 뚜렷하다"라고 감탄하며 1606년 중국에서 "난설헌집"을 출간하였습
니다. 또 그의 시를 연모한 명나라의 한 여성은 소설헌小雪軒이라 이름짓고 난설헌 시에 일일이 화답하는 시문 123수를 엮은
"해동란海東蘭"을 출간하는가 하면, 1711년에는 일본에서까지 "난설헌집"이 간행되었습니다.
급진개혁사상가 허균許筠에 대해 가장 많이 연구했던 교수가 이이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해제위원이고, 그 다음이 연세
대학교 허경진 교수입니다. 허경진교수는 이이화교수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사진속의 책은 허경진교수가 집필한 허난설
헌, 허균 연구자료집,,,, "허균시연구許筠詩硏究"는 1984년에 출판되었던 책이고, "허균의 시화"는 1982년에 출판되었던
책입니다. 제 서재에 아직 남아있는 책입니다.
碧 海 浸 瑤 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 鸞 倚 彩 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 蓉 三 九 朶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紅 墮 月 霜 寒 달빛 서리 위에 차갑기만 하여라 (허경진교수 번역)
허난설헌은 마치 자신의 짧은 생을 예감이라도 한듯 이 같은 시를 남기고 스물일곱 젊은나이에 스물일곱 붉은 꽃송이처
럼 지고 말았는데요,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종하지 않고 비극적인 삶의 단면을 예술로 승화한 난설헌의 글들은 다소
몽환적이거나 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 허난설헌은 15세에 김성립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안동 김씨 집안인 시댁은 5대째
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집안이었는데 그 집안의 후손인 김성립은 기록에 의하면 얼굴을 못생겼으며 학문은 형편없었고
방탕성까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성립은 허난설헌과 짝이 될 수 없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난설헌
이 죽던 해에야 겨우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죽을때의 벼슬도 홍문관 정자로 족보에 기재되었으니 재주와 학식이 난설헌
과는 도저히 비교할 만한 대상이 못되는 남자였습니다. 아마도 자기보다 너무나 뛰어난 난설헌에게 자존심이 상하여,
그것이 그처럼 못된 행동으로 빗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더구나 김성립은 과거공부 한다고 해서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난설헌은 신혼 초기부터 불행하기만 했고, 마음이 맞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들 사이에서
곱게 자란 그로서는 너무나도 커다란 시련이었을 겁니다. 난설헌이 평범한 가정주부가 될수는 없었을 겁니다. 뛰어난
재주와 예술가로서의 성격이 그를 한낮 아내로서 그리고 며느리로서 놓아 두지 않았던 것인데, 동생 교산이 누님의 죽음
을 슬퍼하여 지은 글을 보면 시어머니의 눈밖에 나서 고부간에도 늘 불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토록 비인간적인 이조사
회에서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던 허난설헌은 불행한 나날을 보내다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부용꽃이 지듯 그렇게 허무하게
요절하게 됩니다(1563-1589)
女子가 이름을 갖지 못하던 시절에 이미 허초희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시인으로 활동했던 허난설헌. 미모를 갖추고 지적
인 수준도 상당했던 여자가 남자 잘못 만나서 그리고 모순이 많은 그 시대의 시대상황에 어쩔수 없이 꿈도 펴보지 못하
고 여자로서 그리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 그녀의 삶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녀의 시詩에 등장하는 "난새"는
남조 송나라 범태의 "난조시서"에 나오는 새입니다. 계빈왕에게 잡힌 난새는 새장에 갇혀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부를 운
명에 처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삼 년 동안이나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계빈왕은 거울을 걸어, 난새에게 자신의 모
습을 보게 했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난새는 슬피 울기 시작했고, 결국 난새는 거울을 향해 달려 나가 부딪혀 죽고
맙니다. ‘난새’는 집안의 몰락과 시어머니와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 등 불행한 가족사를 지녔으며,여성이기 때문에 사회적
으로 그 재능을 표출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허난설헌의 상황을 기막히게 비유하는 소재입니다.
사진 속의 부용꽃은 정부대전청사 테마숲에서 자라고 있는 부용꽃이랍니다. 부용꽃은 꽃송이가 아주 커다란 모양새를
하고 있어요. 꽃송이 하나의 크기가 15-17cm는 될 거 같아 보여요. 제 손가락 뼘길이로 재어 보니 뼘길이로 재고
3~4cm는 더 되는거 같아요. 무궁화과의 식물이라서 무궁화와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고 더러 무궁화 개량종이냐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 꽃인데, 무더운 여름날 국도를 달리다보면 쉽게 볼 수 있는 꽃이기도 합니다. 무궁화와 다르다면
무궁화는 목본식물이고 부용꽃은 초본식물입니다.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허난설헌의 생가 전경. 허균의 생가이기도 한 곳인데, 허초희가 친정아버님과 오라버니,남동생과 행복하고 풍요로
운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합니다. 허씨 가문의 몰락, 그리고 그 이후 오랜 시간동안 아무도 가지 않았던 그래서 더 처절하게 고독한 세월
을 보냈던 난설헌의 생가터에 새봄의 볕이 들고, 매화꽃 붉은 기운에 생기가 돕니다.
얼마전에 새로 만들어진 5만원권 고액지폐에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그려져서, 신사임당은 이율곡과 함께 모자母子가 모
두 화폐에 주인공으로 그려졌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요,,,,신사임당은 허난설헌과 거의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살았
던 사람이면서 매우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는 별로 내세울것 없는 한미한 집안의 평범
한 사람이었는데, 이원수가 김성립과 다른점이 있다면 이원수는 상황판단을 빨리 하고, 신사임당 친정의 경제력을 인정
하고 사위 노릇 충실히 하고 신씨가문의 생각을 빨리 읽어 무남독녀 외동딸인 신사임당 집안의 재력을 상속받게 됩니
다. 그리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이씨가문을 일으키게 됩니다. 옛기록을 찾아보면 신사임당 친정인 신씨 가문의 모든 재
산을 외손자인 이율곡이 상속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율곡이 태어난 오죽헌은 신사임당의 친정인 것에서도 알 수 있
듯이 신사임당은 결혼생활의 대부분을 이런저런 핑계로 친정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 시대의 대부분의 여자들처럼 "시
집살이"를 하지 않았던 겁니다. 신사임당은 결혼후에도 친정에서 지내면서 편안한 환경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만큼
그렸고, 그 그림들은 잘 보존되고 후손들에게 잘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집안인 이씨 가문에 막대한 재산을 보탠
사람이었으므로,,,,허초희의 그 뛰어나고 아름다운 시가 허씨 가문의 몰락으로 모두 사라지고 중국 문장가들이 암송하던
시로 그녀의 시를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에 의해 겨우겨우 명맥이 보존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신사임당이 김성립 같은 남자를 만나 결혼생활을 했더라면 "현모양처 신사임당"으로 인정 받을수 있었을까요?허난설헌
이 차라리 이원수 같은 남자를 만나 결혼했더라면 아시아에 이름을 떨칠 여류시인하나 남겼을텐데요,,,신사임당이 남자
들이 기득권을 가졌던 그 시대에 인정 받으면서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인정 받았던 것과는 달리 허난설헌은 그의 능력
이나 작가로서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오랜 시간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모순이 많던 그 시대의 시대
상이기도 하고, 친정가문의 몰락, 그리고 남자 잘못만난 것도 실패의 한 원인이 될 겁니다. 허초희 같은 인물을 남편이
그 재능을 인정하고 시詩를 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줬더라면 우리 역사상에 멋진 여류시인, 나아가 아시아에 이름을
떨칠 멋진 여류시인 하나 남길수 있었을텐데요,,,,
허균은 “누님의 시와 문장은 모두 하늘이 내어서 이룬 것”이라고 극찬했는데, 허난설헌이 떠나고 400여년의 세월이 지난
1999년 강릉의 뜻있는 문인들에 의해 선양사업회가 발족되고 "허균·허난설헌문화제"가 시작되었습니다.
허균의 복권復權과 더불어 허난설헌을 재평가 하는 작업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2009년의 봄. 마침내 ‘허난설헌문화제’로 재조명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허난설헌 420주기 추모행사는 학술포
럼, 체험행사, 들차회, 백일장, 시낭송회 및 솔밭음악회, 헌다례 등 다채롭게 펼쳐졌는데,,,,물론,,,,, 지나온 세월이 긴 만큼
해야 할 일도 많을 겁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근래 난설헌을 재평가하는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는 점인데,
‘허난설헌평전’을 비롯, ‘붉은 비단보’, ‘그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스물 일곱 송이 붉은 연꽃’ 등 평론에서 시, 소설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듭니다. 또한 다양한 문화콘텐츠로도 시도되고 있는데, 극단 ‘씨어터21’에서 ‘아! 난설헌’이라는
창작극을 공연했는가하면, 뮤지컬 작곡가가 오페라음악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선사가 말하기를 “뼛속에 사무치는 추위없이 코끝을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는데,아무도 가지
않았던 그래서 더 처절하게 고독한 세월을 보냈던 난설헌의 생가터에 새날의 볕이 들고, 매화꽃 붉은 기운에 생기가
돕니다. 이 시대의 "허초희許楚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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