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의병(乙未義兵) 은 청일전쟁후 명성황후 민씨 시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제시행에 분격한 유생들이 근왕창의의 기치아래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 세력의 구축을 목표로 일으켰다. 1895년(고종 32년)_ 8월 20일 민비가 시해되고 뒤이어 왕후폐위조직이
발표되자, 보수 유생들은"토역소"들을 바쳐 친일 정부의 폐위조처에 반대함은 물론, 일본군을 토벌, 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하였다. 8월 22일 서울 창의소에는 고시문이 나붙기 시작하고 10월 중순을 전후로
충청남도 회덕, 유성, 진잠 등지에서는 문석봉 등이 토적의 뜻을 선포하고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친일정권이 공포, 시행한 단발령은 유생들과 일반 백성의 반일, 반정부 기운을 더욱 고조시켰다.
1896년 1월 중순 경기, 충청, 강원도 등 각지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난 의병항쟁은 2월 상순에는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
그리고 함경도 북부까지 확대되었다.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을미의병은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갑오경쟝의 새로운 법령을 시행하는 관찰사,군수 혹은 경무관, 순검 등을 친일파로 지목하여 처다나거나 문책하고
또 그들을 진압하려는 관군및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아울러 전선, 철도 등일본군의 군용시설을 파괴하거나 일본군 주둔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경기도에서는 이천과 여주에 창의소를 설치하고1월 15일을 전후로 봉기하여
남한산성 서남일대에서 세력을 떨쳤다. 그 뒤 두 지역의 의병이 통합하여 2,000여명에 이르렀는데, 박준영이 대장,김하락이
군사 겸 도지휘가 되었다. 2월 25일 의병부대가 남한산성에 입성하자 안성 의병 수백명과
춘천 의병 3,000여 명도 남한산성으로 집결한다는 소문으로 친일정부를 긴장시켰다.
문석봉(1851~1896), 의병장, 독립운동가,
경복궁 오위장, 진잠현감, 양호소모사, 의병장 역임. <의산수록. <의산유고> 집필
강원도 홍천에서는 이항로 문인 이소응이 의병 1,000여명을 규합하여 춘천부를 점거하고 관찰사 조인승을 처치하였다.
강릉에서는 여주 유생 민용호가 원주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활동함으로써 의병 운동이 의병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영동 9군창의진이 편성되었다.충청도 홍주에서는 전 승지 김복한, 이 설, 안변찬 등이 기병하여 한 때 그 일대를 지배하였고,
제천에서는 유인석이 그의 문인 서상렬, 이필희 등과 함께기병하여 호좌창의진을 편성하였다.
그 뒤 창의진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일부 의병과 합류하면서 병력이 4,000여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단양군수와 청풍군수를 체로하여 처치한 후 충주부를 점거하여 김규식을 처단하였다.
이때 유인석은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이라는격문을 공포하여 나라의 모든 친일행위를 중지하고 의병을 후원하여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호좌창의진이 충주부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각처 의병들의 기세가 높아지고
충주부로 몰려오는 의병도 늘었다. 경상도의 경우 산청에서는 곽종석 등 200여명의 유생이 의병진을 편성하여 안동부를 점령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 뒤 10여일동안 사방에서 모여든 의병이 무려 4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훈련을 받지 못한 의병들이었기때문에 관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사방으로 흩어졌으며결국 안동부도 빼앗겼다.
김천과 성주에서는 허위 등이 의병을 일으켜 금릉 등지를 점령하고 대구에 다다랐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아 해산하였다.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 봉기에 당황한 친일정부는 여러 차례 조직을 반포하고 선무사를 파견하는 한편,
서울 수비의 주력부대를 지방으로 출동시켜진압을 서둘렀다.
이 틈을 타서 근왕세력인 정동파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여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친러정권은 혼란한 시국을 수습하기 위해 친일내각의 요일들을 "역당" 또는 "국적"으로 단죄하고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이와 더불어 갑오련 이래의 동란과 개혁으로 인한 경제파탄과 민생고의 극심함을 고려하여
그동안 적체된 각종 미수, 미납의 공세를일제 탕감한다는 조처도 취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의병 봉기의 대의명분을
없애버렸으며 그들을 해산시키기에 적합한 것이었다.그 결과 1896년 3월 이후 의병활동은 점차 쇠퇴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회유정책을 거부한 유인석과 민용호 부대는 만주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을미의병은 비록 ‘근왕창의’라는 왕조 중심적이며 위정척사론적인 사상적 한계성을 탈피하지는 못하였으나,
청일전쟁 중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 동학농민운동에 뒤이어
임진왜란 이래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의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유성의병 사적비
" 이 곳 장대동은 유성을 비롯한 대전일대의 사민(士民)들이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국에서 가장 먼저
변을 일으킨 역사의 현장이다. 1895년 9월 18일 진잠 현감을 지낸 문석봉이 국모의 원수를 갚자는 국수보복론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써 보답하는 주욕신사主辱臣士 정신에 입각하여 민영환과 손근수, 신응조등 중신들의 찬동을 얻어 옥천의 오형덕, 공주의 김문주,
회덕의 송도순 등 지방 사족들과 함께 유성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유성장터에서 수백명의 의병을 모아 회덕현 무기고를 급습하여 무장하고
진잠과 공주를 거쳐 공주의 외야동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의병들은 왕촌 일대로 피신하였다가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의병장 문석봉이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함으로써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유성의병은 을미의병의 효시로서 단발령 공포후 전국적으로 의병 봉기를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유성의거는 일제에 맞서 이 지역의 선비와 민중들이 함께 분기했던 고귀한 투쟁의 역사이다.
여기에 비석을 세움은 유성의병의 사적을 후세에 알려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며 백여년간 유성의병의 기개가 우리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지기를 바라는데에 그 취지가 있다. 2004년 9월 18일"
을미의병의 효시, 유성의병사적비가 있는 장터공원, 유성구 장대동 유성전통시장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번에는 유성구 노인복지회관 건물도 위치하고 있다.
장터공원 주변 상가의 모습
유성전통시장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장대동에서 5일마다 열리는 정기 재래시장이예요.
매월 4일, 9일, 14일, 19일, 24일, 29일이 유성전통시장 장날인데요, 대전, 공주, 논산, 금산 등지에서 모여든 산물들이 거래되는 장터예요.
유성전통시장에 대한 기사는 제 블로그에서 몇 번 썼던 거 같아요.
어제(29일)에도 유성전통시장에 갔었는데 폭염주의보가 내린 더운 날씨에오전부터 논산 강경시장에서 취재하고 사진 찍으며 한나절을 보내고
유성전통시장에 갔더니 이미 파장할 무렵(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이었으니) 이었고, 너무 더운 날씨탓인지 저도 피곤해서 사진 상태도 별루여서
유성전통시장에 대한 사진은 4월에 찍었던 사진으로 대체하려구요.
강경전통시장 장날도 매월 4일, 9일이어서 유성전통시장과 같은 날이 장날이예요.
"봄내음 물씬 풍기는 유성5일장에 가다" http://blog.daum.net/esplanade12/11804088
* 이 기사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블로그기자단 활동으로 제작한 컨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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