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고택은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 노성산 남쪽 자락에 자리 잡았다.
명재 윤증이 생활하던 원래의 고택은 인근 병사마을 유봉이라 불리던 곳에 있었다. 1681년까지도 유봉에 살았다고 하니,
명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대략 말년인 18세기초에 둘째 아들이 지어준 교촌리 현재의 터로 이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통가옥은 한 개가 아닌 여러 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있다. 여러 개의 건물은 서로 흩어져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 묶여져 있기도 하다. 명재고택은 크게는 사랑채, 사당채, 안채로 나뉘어져 있다. 이들 또한 흩어져 있음과
동시에 서로 묶여 있다. 명재고택의 경우 건물들이 나뉘고 묶이는데 있어 큰 특색이 있다.
건물들이 서로 묶이되 각 건물의 개성은 거의 유지된다는 점이다.
명재고택에서는 이런 특색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수법들이 있다.그중 하나가 담이다.
명재고택에서 담은 건물들을 담에서 크게 둘러싸는 것이 아니라 나뉘어진 건물들 사이에 놓여진다.
마치 필요한 부분만큼만 최소로 묶는 식이다.
이러한 특이한 방식에 의해 각 건물들은 어느 정도 독립성을 얻게 되며
각 건물의 개성 또한 유지될 수 있게 된다.
명재고택의 사랑채 앞에는 넓은 마당을 두고 커다란 연못을 조성했고 우물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일절 담장이나 별도의 경계를 두지 않았고,단지 꽃나무들로 아늑한 분위기만 조성했다.
네모난 연못은 향교 앞까지 걸쳐 있어서, 이 집에 소속되었다기 보다는 노성읍 전체를 위해
제공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사랑 앞마당은 마을에 개방되어 있다.
담장과 행랑을 둘러 한 채 만을 보호하고, 나머지 영역을 과감히 향리에 공개하고 있다.
명재고택은 앞의 사랑채와 안쪽의 안채, 사이의 행랑채로 구성된다.
아울러 사랑채 뒤쪽 동편 높은 곳에 사당채 영역이 별도로 조성되었고안채의 서쪽에는 곳간채가 숨어있다.
사당채는 안채 동쪽 높은 곳에 위치한다. 이것은 마을 전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ㄷ자 안채는 일견 완전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5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날 개채의 길이가 같고,날개채 끝은 모두 부엌으로 마감되었다.
또 한 양날개 지붕 용마루 선을 모두 동일한 높이에 만나며,
대칭적 구성과 함께 수평적인 평온함을 앞마당에 부여하고 있다.
앞마당의 중심성은 이 집의 다른 마당들이 길쭉한 장방형의 비례를 가진 것과 달리 정방형이라는 비례를 통해 얻어진다.
또, 외부 공간도를 그려봐도 정방형 안마당이 중심 장소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안채 동쪽의 독립된 마당, 뒤쪽의 긴 길과 같은 공간, 서쪽 곳간과 이루는 긴 통로, 그리고 행랑채 앞마당 등
안채를 둘러싼 사방의 외부공간들이 모두 긴 장방형의 비례를 가지고 있다.
또, 그것들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채 엇물리면서 안채를 에워싸고, 다시 장방형의 앞마당을 감싸고 있다.
충남 논산지방의 살림집들은 수평적 구성을 구조로 삼는다. 명재고택의 안채와 행랑채도 물론 수평적이다.
그런데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채는 당연히 수직적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지역적 정서에 맞지 않음은 물론
뒤쪽 안채와 심한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랑채의 긴 단을 이중으로 구성함으로써
사랑채의 수평성을보장함과 동시에 바닥 높이를 높였다. 높은 바닥은 연못을 바라보기에도 좋았다.
사랑채의 누마루는 연못을 감상하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행랑채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 평면은 대칭적으로 4칸 중 가운데 두 칸을 큰 사랑방이 차지하며 양 옆 칸은 마루다.
그러나 밖에 서서 보면 동쪽 마루를 누마루방으로 문을치고 창을 닫아 비대칭으로 보인다.
즉, 평면적으로는 4X2 칸의 단순한 상자 같은 입체지만 각기 다른 방향을 가진 난간과 다양한 높이의 레벨을 통하여
단순성을 극복하고 공간을 위격을 분리하였다. 작은 사랑과 큰 사랑방은 서로 직각으로 놓여지며, 70cm 정도 높은
누마루를 통해서연결하여 서로 독립 분리된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누마루와 사랑대청의 레벨차이는 90cm이다.
두 공간의 성격이 우연히 다름을 보여준다. 작은 사랑과 누마루가 한 쌍이라면, 큰사랑과 사랑 대청이 한 쌍이다.
그리고 두 영역은 앞 툇마루의 계단을 통해 누마루로 연결된다.
창호의 구성은 치밀한 기술의 극치를 이룬다. 칸 사이는 매우 규칙적이며 정확한 각도와 배열로 이루어졌다.
각 부분들은 서로 명확하게 분절되어 있다. 안채와 행랑, 행랑과 사랑채의 관계는 연속적이면서도 분절적이다.
주요 방과 그에 부속된 수장시설의 관계를 보면, 안방과 옷방, 건넌방과 다락, 안사랑방과 고방, 큰사랑방과 골방들은
완결된 한 쌍의 관계를보여준다. 주공간의 부속공간, 사람과 물건의 공간, 큰 공간과 작은 공간의 쌍들이다.
정방형의 안마당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긴 장방형 마당들이 에워싸고 있다. 또 이 마당들 사이에 작은 셋 마당이
요소요소에 위치하여외부 공간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안채 동쪽의 톳미당은 한쪽은 담으로 다른 한 쪽은 문으로 막혀 있다.
기다란 공간의 종착부에는계단식으로 조성된 화단이 놓이고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공간의 초점이 된다.
그 중간에는 양감있는 굴뚝이 오뚝 서 있다.
안채의 북쪽 뒷공간은 보통 안뒤라고 부르는 장소다.
명재고택의 경우 뒷산을 절토하여 문축을 길게 쌓아 안채 뒷문과 함께 기다란 통로가 만들어졌다.
이 곳은 마당이라기보다는 외부의 복도와 같은 공간이며, 멀리 끝에는 계단식 담장이 초점을 이룬다.
명재 윤증선생 (1629-1714) 본관은 파평, 자는 자인, 호는 명재(明齋), 유봉, 시호는 문성
명재 윤증은 조선 유학사에서 예학을 정립한 대학자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가 죽은 뒤 조문 인사가 무려 2300여명에
달했다하니 당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숙종실록’은 윤증을 스승을 배신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숙종실록 편찬을 주도했던 노론계 인사들이 윤증을 왜곡한 탓이다. 윤증은 노론의 반대편에 있던 소론의 영수였다.
조선 유교의 주류였던 기호유교는 바로 윤증의 손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노소 분당은 조선의 지배 철학인 주자학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시작됐다. 서인을 대표하는 우암 송시열은 주자학을 신봉하고 실천하고자 했지만 윤증을 비롯한 일부 소장파 학자들이
비판을 제기하며 분열이 생겼다. 송시열과 윤증은 사제지간이다. 윤증은 송시열의 문하 중에서도 백미였다.
명문가의 자제이면서 대학자를 사사한 윤증의 앞길은 불행하게도 순탄치 않았다. 어린 시절의 병자호란과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스승 송시열의 대립은 인생에 큰 시련을 주었다. 온 가족이 피난한 강화도마저 청나라 군대에 함락 당하면서 어린 윤증은
선비들의 순절과 항쟁을 지켜봤다.윤증의 어머니 공주이씨도 적에게 수모를 당하느니 자결하겠다며 목을 맸고,
아버지 윤선거는 부친을 위해 성을 탈출했다. 어머니의 시신은 어린 윤증이 수습했지만 아버지 윤선거는 이 사건을 계기로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채 금산(錦山)에 은거했다. 병자호란 뒤 당시 남인이던 백호 윤휴가 주자학을 비판하는 일이 벌어졌다.
송시열은 격노하며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한다. 반면 윤선거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주자학의 경직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송시열은 윤선거까지 강하게 비판했고, 불편한 관계가 시작된다.
송시열은 훗날 윤선거가 죽은 뒤 묘비명에 그 불편한 마음을 그대로 나타냈고, 특히 강화도에서의 일을 비난했다.
윤증이 수차례 다시 써줄 것을 부탁했지만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윤증은 송시열의 태도를 지적하는 편지를 쓴다.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해 나타났다. 그가 죽은 후 숙종은 정승 벼슬까지 내리고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것을 슬퍼하며
조사를 써서 추모했다. 조선조 붕당정치는 일제강점기 식민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당쟁’으로 폄하됐다.
식민사관에 입각한 국사 교육은 광복 이후까지 이어져 여전히 그런 시각이 남아있다. 인간의 역사는 대립과 투쟁 속에서 발전된다.
조선 중기 이후 노소 갈등은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문제(윤증)의 대립이었고,
호란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를 제기시켰다.
윤증은 어진 스승을 배반했다는 패륜으로 지목받았지만, 그를 따르던 소론 진보세력들은
편지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송시열은 윤증과 사제(師弟)의 의를 끊는다.
윤증은 일련의 사건 속에서 정치적으로 서인 내부에 존재하던 강경파와 온건파 중 온건을 주장한 소론의 영수로 추대된다.
강경파인 송시열 측의 노론과 치열한 당쟁의 서막도 열린다.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는 사건을 역사적으로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두 학자가 거주했던 회덕(懷德-송시열)과 니성(尼城, 노성-윤증)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이후로 노론과 소론은 경종(景宗)·영조(英祖)·정조(正祖) 대로 이어지며 격렬히 대립했으나,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노론이 승리하면서 노론 일당의 전제정치 체제로 굳어졌다
명재 윤증은 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우의정을 임명 받았지만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간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됐고, 정치당국자나
그의 사상을 꾸준히 전승 발전시키면서 노론 일당 전제체제 하의 건전한판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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