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카톨릭Catholic의 카타콤베Catacomb, 신리성지
아픔 없이는 님들을 기억할 수 없는
이곳 신리성지에 오면
들판에 부는 바람조차
님들의 목쉰 소리로 우리를 부릅니다
복음을 증거하다 목숨 바친
순교 성인들과 동료 순교자들
이름 없이 잊혀지면 죽어간 순교자들께
우리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힙니다
그 한결같은 신앙의 삶 닮지 못한 부끄러움
이토록 아름답고 유서 깊은 성지를
더 소중하게 가꾸고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
뉘우침의 기도로 봉헌하며 우리 마음 안에 먼저
기도의 기념비 하나 세우며 촛불을 밝힙니다
눈물 없이는 님들을 기억할 수 없는
이곳 신리성지에 오면
매번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속에
목자들과 교우들이 미사 중에 주고 받던
그 애절한 신뢰의 눈빛이 보이고
훗날 한국교회의 보무이 될 사료정리를 위해
밤낮으로 노심초사 땀 흘리던
다블리 안 주교님의 글씨 쓰는 손길도 보입니다
언제 잡혀갈지 몰라
살아서도 이미 죽음을 체험하는 이들의
안타까운 한숨소리도 들려오고
박해의 칼 아래 무참히 스러졌기에
죽어서도목 없는 시신으로 발견된
무명 순교자들의 마지막 신음소리도 들려옵니다
지은 죄도 없이 어둠 속에 숨어 살았던
님들의 고통과 눈물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밝은 미소에 웃고 지냅니다
피 흘려 신앙을 증거한 님들의 죽음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자유 속에 편히 살고 있습니다
그 은혜 충분히 감사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살아온 날들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님들처럼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는
한 줄기 바람으로 뜨겁게 힘차게 일어서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빈 들판을 가득 채우는 겸손의 흙이 되어
이 땅에 복음을 심고 가꾸고 퍼뜨리는 순교자의 후예가 될 수 있도록
삼위일체의 하느님께 전구하여 주옵소서
오직 사랑으로 피 흘리며 우리를 구원한 님들
오늘도 우리를 사랑으로 재촉하고 부르시는 거룩한 님들이여!
이해인의 "신리성지에서"라는 시詩입니다.
"신리성지"는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다블뤼 안토니오주교의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이었으며,
성지내 초가집은 손자선(손 도마, 1866년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 성인의 생가生家입니다.
안토니오주교는 이곳에서 끊임없이찾아드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신앙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각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제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창기의 한글 교리서 저술과 간행, 조선교회의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수집정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는 일도 여기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자료들이 훗날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토대가 된 이른바
<다블뤼 비망기>입니다. 안토니아 주교께서 생활하시던 주교관의 뼈대는 옛날 그대로입니다.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 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 상당 부분의 실물 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성인들의 숨결과 손때가 그래도 묻어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리성지는 순교자들이 태어난 집과 마을,
거닐던 길 그리고 경작하던 농토도 그 지명들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어 순교자들의 자취를 생생히 느끼게 합니다.
특히 손자선 성인의 생가와 함께 안 주교와 오신부, 민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가등 성인 네 분이 붙잡힌
'거더리'의 집(신리 99번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해줍니다.
성 다블뤼 주교관에는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께서 생전에 사용하시던 용품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진의 1시 방향에 있는 도포는 안토니오주교가 선교활동을 할때 입으셨던 옷인데, "천사의날개"라고 불리우던 옷이랍니다.
구한말 카톨릭이 박해받던 시절에 외국인 선교사가 우리 한국땅에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상복을 입고 상중喪中에 있는 것처럼 변장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당시 사회관습으로는 상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말을 시키지 않는 풍습이 있었고, 외모가 한국인과 다르고 한국어에 서툴러서 그래서 외국인 선교사임이 탄로나지 않기 위해서
하얀 도포입고 갓을 푸욱 눌러쓰고(큰키를 가리느라 더 갓을 눌러썼겠지요) 앞가리개까지 들어 얼굴을 가리고 생활했다고 합니다.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읍 신리 151번지에 위치한 "신리성지" 부지내에 건립된 신리성지 공소입니다.
신리성지 경당 내부 모습입니다. 일요일 교중미사가 시작되기 바로 전의 모습입니다.
우리 본당에서 성지순례간 일행들이 이 경당에 잠시 들렀었는데, 이 작은 경당이 생긴 이후로 이렇게 많은 일행이 이 경당에
모인게 드문일이라고 하셨어요. 우리 본당에서 이날 대형버스 9대를 준비해서 참석했으니, 350명 정도가 되지않았나 싶어요.
신종플루 예방 차원에서 차량마다 손소독제까지 든든하게 비치해서 말이지요.
신리성지 경당에 있던 파이프 오르간. 작지만 단아한 모습을 한 파이프오르간이었어요.
파이프 오르간이 아름다운 성당은 서울 명동주교좌성당, 대전 대흥동 주교좌 성당, 대전 노은동성당입니다.
명동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은 아주 유명하구, 노은동의 파이프오르간은 독일 퀘헬사가 제조한 명품오르간입니다.
노은동성당 건립당시 그 본당 주임신부님이 음악에 관심이 많은 분이셔서 특성화한 본당을 만든다는 취지로
파이프오르간에 많은 투자를 했었습니다. 물론 성가대도 매우 활성화했던 본당이구요.
분당 요한성당의 파이프오르간도 유명하죠?
분당 요한성당은 건물 자체가 아름다운 성당으로 평가를 받고 반드시 카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사진 찍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사진 찍고 싶어하는 공간입니다. 규모로 보면 동양에서 가장 큰 본당이기도 하죠?
저녁시간이면 본당 건물 외부에 야간조명을 넣습니다. 분당 요한성당엔 "피에타" 조각작품이 있어요.
신리성당 경당의 제대祭帶 모습입니다.
단아하지만 평화로운 모습이 느껴졌어요.
"신리성지" 주임신부님이십니다.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과 담소를 나누고 계셨는데, 신리성지신부님께 "사진 찍어두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어보는데 신리성당 주임신부님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옆에 계시던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께서 "포즈 취해 줘라!"는 의미로
신리성지 신부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하셔서(신리성당 주임신부님보다 우리 본당 주임신부님이 연세가 더 많으십니다)
신리성당 신부님으로서는 얼떨결에 본인의 의사를 표현할 틈도 없이 사진이 찍히셨습니다.
사제복(수단)을 입은 모습이 기품이 있지요? 10년뒤, 그리고 20년 뒤 성직자로서의 기품이 기대가 됩니다.
신리성지의 성모 마리아상이 독특했어요. 다블뤼 주교관 건물을 딛고 서 있는 형상입니다.
다른 본당에서는 볼 수 없는 성모마리아상일겁니다.
성 다블뤼 주교관 건물을 뒷면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신리공소는 1815년 초가집으로 시작했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 형체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에서 파견된 수도자들과 신자들의 도움으로 고증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의 초가집 공소를 복원해 놓았습니다.
다블뤼 주교관 앞마당 잔디밭에 있는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기념 조형물입니다.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
신리성지를 출발해서 이제 "내포평야 도보성지순례"길에 나섭니다.
신리성지-합덕성당-솔뫼성지에 이르는 7.5km의 길을 "십자가의길"을 하면서 도보로 걷는 겁니다.
Catholic에서의 9월은 "성지순례의달"입니다.
이 날 기수단이 들었던 십자가상입니다. 이 "도보성지순례"를 위해 헌화회에서 특별히 예쁘게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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