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정

너는 나의 계절이고 나는 너의 봄이기를,,,,,,,

아름다운 여정

안젤라가 만난 사람

친정엄마와 함께 2박3일

안젤라Angella 2012. 12. 1. 08:00

 

                 친정엄마와 함께 2박3일

 

 

유난히 "아들" "아들" 하던 엄마였다.  엘리트 공직자이셨던 아버님께서 결혼 8년만에 어렵게 나를 얻으셨는데, 그래서 할아버님도 할머니도 내가 태어나자마자

 

소를 잡아 온동네 잔치를 하고 기뻐하셨는데도, 게다가 할아버님의 가장 반듯하고 든든한 아들, 집안 어른들의 바램대로 공부 잘하고 착실하게 성장하여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고

 

직장인으로서도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인 내 아버님의 딸인 내가 "친탁"을 해서 친가에서는 손녀인 내가 태어난게 축제무드였는데도,,,그즈음 할아버님께서는

 

당신의 큰며느리로 시집와 아들손자를 셋씩이나 1~2년 터울로 쑴펑쑴펑  낳아준 큰어머니(백모님)에게 "너는 딸(손녀)도 못 낳느냐?" "아들밖에 못 낳느냐"고 하시며

 

 황당한 시집살이를 시키며 손녀를 고대하셨다는데,,,엄마는 내가 아들이 아닌게 못내 섭섭해서 별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자라면서도 아버님께 단한번도 내가 딸이라서 아들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거나 딸이라서 뭐하면 안 된다거나 하는 말씀이 없으셨다.

 

내또래의 친구들은 집에서 딸이라서 또는 아들이 아니라서 푸대접을 받기도 하고 아들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눈치였지만  내 아버님께서는 나나 남동생에게 똑같이

 

공평하게 하셨다.  오히려 내가 "친탁"을 하고 남동생이 "외탁"을 했기 때문에 "친탁"한 나를, 맏이인 나를 더 어여삐 소중하게 여기셨다.

 

 

 

내가 어린 아기였을때부터 할아버님께서는 나를 거의 안아서 업어서 키우다시피 하셨다고 한다.  보낭에 싸서 이불에 내려놓을틈이 없이 늘 안고 계시고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업고다니고 손잡고 다니고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님댁에 온가족이 모이면 식사시간에 밥상을 받으면 할아버님 밥상은 따로 한 상,

 

남자어른끼리 두리반에 한 상, 여자어른끼리 두리반에 한 상, 그리고 아이들끼리 한 상 이렇게 네개의 상이 차려지곤 했는데, 난 할아버님이 드시는 상에서

 

겸상을 하는 유일한 손녀(손자)였다.  나보다 어린 남동생이나 사촌동생이 태어난 이후에도 말이다.  겸상만 했냐면 할아버님께서 손수 밥을 떠먹여주시고반찬을 수저위에

 

놓아서 먹이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할아버님과 겸상도 못하고 밀려나서 여자어른들 상에서 식사하셨었는데,,, 친정 문중 족보에 내 이름은 우리 대 후손 이름이 기재된 란에

 

손자, 손녀 구별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같은 글씨크기, 같은 공간 차지하며 공평하게 기재되어 있다.  나보다 나중에 태어난 할아버님 아들손자는 내 밑에 기재가 되어 있다는,,,,

 

지금도 가끔 어렴풋하게 어렸을때 할아버님댁에서 식사하던 그 모습이 생각나는데, 닭백숙을 하면 살을 하나하나 뜯어서 먹이고 닭죽 끓여서 내가 좋아하는

 

부위를 죽에 얹어서 먹여주시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님댁에 가면 마당이 아주 넓고 나무와 꽃이 많이 심어져 있었는데, 포도나무,감나무, 단감나무,홍시감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 같은 나무들이 심어져있었고, 화단엔 온갖 꽃들이 계절마다 피어나곤 했다.  채송화, 봉숭아, 나리, 백합, 장미, 국화,수국,다알리아,,,

 

감나무 밑엔 백합꽃이 여러그루 심어져있어서 해마다 백합꽃을 서너송이 피우곤 했는데, 내가  그 꽃을 갖고 싶다고 하면 할아버님은 거침없이 백합을 꺾어 주셨었다.

 

내가 태어나고 5살 터울로 남동생이 태어났고, 난 귀여운 "첫손녀"인데다가 남동생"터"까지 잘 팔아서, 아버님께는 완전히 예쁨 받는 딸이었지만 엄마는

 

남동생에게만 정신이 팔려 아무 생각이 없으셨던듯 하다.  엄마는 날 "서울양행"에서 판매하는 서울에서 바로 공급된 고급옷만 사 입혔고,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서 입히셨다.

 

융으로 만든 천을 떠서 양장점에서 맞춰서 긴원피스처럼 생긴 잠옷을 만들어주기도 하셨다.  엄마가 내게 레이스가 나풀나풀하게된 옷을 입히거나, 머리를 예쁘게 묶어서

 

리본을 곱게  묶으면 내아버님은 싫어 하셨고, 아무말없이 내 손을 잡고 서점에 가서 갖고 싶은 책을 당신이 내게 읽히고 싶은 책은 한보따리씩 사서 안겨 주셨었다.

 

그리고 날 당신의 무릎에 앉혀 놓고 그 멋진 중저음 보이스의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시곤 했다.  나는 달콤한 아빠 목소리를 들으며 종이냄새를 맡으며  잠들곤 했다.

 

 

 

아버님께서는 나를 당신이 원하는 명문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입학시키고, 당신 스타일로 나를 키우셨었다.   바이올린을 쥐여주고,

 

책을 사다주고,,,크레파스며 도화지며,,,연습장은 갱지를 사다가 표지 만들어 직접 만들어주셨고, 내 필통을 꺼내어 내가 쓸 연필을 깎아서 담아주셨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명문공립학교였는데, 초등학교로서는 보기 드물게 도서관에 책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사서교사가 별도로 있었는데, 내 아버님은

 

책 100권을 사서 기증하고 내게는 도서관을 이용하고 책 읽는 법을 알려주셨었다.  그 도서관에서 나는 초등학교 4,5학년 시절을 "자유교양반"멤버가 되어

 

활동했었다.  그 당시 교육장이 고전읽기에 관심이 많았는지 교육청에서 추천하는 몇권의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 토론하고 주관식으로 논술시험을 쳐서

 

학년별로 학교별로 우수자를 선정하고 시상하는 방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우리에겐 "알프스소녀 하이디" "퀴리부인" "그림없는그림책" "동명성왕" 같은 책이

 

정해졌고, 멤버로 뽑힌 우리들은 날마다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분석하고 내용을 외우고 토론했다.  3월초엔 각반에서 뽑힌 60명 정도가

 

5월, 6월, 지나면서 filtering되어 10명 정도가 되고 8월엔 더 줄어 4명이 되고, 9월엔 교육장주최 "고전읽기경시대회" 학년대표로 출전했다.

 

5,6학년들이 1,2년 갈고 닦아 시대항고전읽기경시대회에 출전하는 거였는데, 4학년인 내가 학교대표로 출전했다.  대회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출신학교와는 동떨어진 먼 지역에서 시험이 치루어졌고, 모초등학교에서 시험을 치뤘는데, 6학년들이 다수 출전한 대회에 첫출전한 시험에서 나는 시에서 3등을 했다.

 

그 시험 감독관으로 온 사람이 우리 작은아버님(숙부님)이긴 했다.  그렇다고 문제를 알려준건 없고 그 전날 작은아버님이 우리집에 오셔서 날 앉혀놓고

 

트레이닝을 한 3시간했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작은아버님은 그 시험에 감독관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고 내가 그 시험장에 가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듯 하다.

 

 

다른 친구들은 서슬퍼런 시험감독관에게 웬지 주눅이 들어서 답안도 다 못적었고 쩔쩔매다 나왔다고 하는데, 나는 그 시험감독관이 우리 작은아버님

 

(숙부님)이었으므로 마치 홈그라운드처럼 편안하게 여유있게 느긋하게 시험을 치뤘다.  이어 출전한 도교육감배고전읽기경시대회에서 나는 2등을 했다.  커다란 상장과

 

푸짐한 상품과 트로피까지,,,시상하던날 우리 학교 교장선생님은 좋아서 어쩔줄 모르며 날 번쩍 안아서 높이 들어올려주셨었다.  "자유교양반" 담당이었던 우리 담임선생님은

 

내 볼에 뽀뽀를 해 주셨었다.  "정예멤버"로 남은 선수들은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엔 도서관에서 거의 지내다시피 했다. 제시된 도서를 얼마나 읽고 또 읽었는지,,,

 

대회 날짜가 정해지면 1개월전부터 타이트한 일정으로 "책읽기"가 진행되었고,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책을 읽고 또 읽고 쓰고 토론했었다.

 

밤늦게까지 책읽다가 무심코 바라다본 하늘엔 오리온 별자리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난 오리온 별자리를 좋아하고 그 중에 가장 빛나는  "삼태성"을 좋아한다.

 

엄마는 내가 먹을 밥과 반찬에 무쟈게 신경을 썼고, 간식이며 과일이며 내가 좋아하는 모든것은 늘 재어두고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 먹이셨다.

 

하얀건물 4층인 도서관에서 내려다보는 학교 중정,,,연못,,,싱그러운 바람결,,,우리는 책을 읽고 선생님은 붓글씨를 썼다.  선생님이 붓글씨를 쓰면 나는 옆에 앉아 벼루에 먹을

 

갈았다.  먹을 가는데 쓰일 물은 학교뒷편 옹달샘에서 막 솟아난 정갈한 물을 받아왔다. 선생님이 레슨받는 서예학원에 가서 서예강사에게 그날 쓸 글씨본을 받아오는것은

 

내 몫이었다.  먹을 갈다가 심심해서 어느날 선생님 부재중일때 내가 붓을 들고 화선지에 몇줄 썼는데, 선생님은 잘 썼다고 서예강사에게 보였고 강사는 붓글씨하고 싶으면

 

초급반, 중급반, 다 생략하고 고급반부터 쓰기 시작하면 되겠다고 했다.  나는 손글씨를 예쁘게 반듯하게 잘 썼는데, 덕분에 우리 담임선생님이 손글씨로 써서

 

처리해야 할 부분의 일부분을 역할분담하고 있었다.  우리 학년이 시험 보는 "쪽지시험" 문제지를 출제하는 일은 내가 했다.  그때는 복사기가 없던 시절이라

 

원지에 철필로 긁어서 그걸 등사기에 넣고 먹을 발라 밀어서 한장한장 시험지를 만들었는데, 선생님이 "새교실" 책을 주면 내가 철필을 잡고 원지를 긁어서

 

시험문제를 작성했다.  청소시간에 다른 친구들이 청소할 시간에 나는 교실 앞좌석에 있는 선생님 책상에 앉아 철필을 잡고 원지를 긁었다.  오전수업만 하고

 

오후 수업은 생략했으니 교과성적은 어땠느냐구?  "새교실" 문제지 맨 아래칸에 보면 "뒤집혀진 작은글씨"로 문제에 대한 해답이 적혀있었는데, 나는 그 답을

 

외워서 기억했다가 시험치를때 적었으므로 "쪽지시험"은 늘 100점이었다. 오후가 되면 그 원지를 들고 담임선생님이랑 등사실에 가서 등사기에 검정잉크를 넣고

 

긁은 원지를 놓고 한장한장 밀어서 시험지를 만들었다.  몇장?  우리 학년 학생 인원수만큼,,,시험지는 인쇄소에 맡겨서 쉽게 만들면 될걸 뭐 원지에 철필로 긁는 것까지

 

했느냐구?  그 당시는 교육예산이 넉넉하지 않았던거 같고, 선생님은 우리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열성을 부렸던거 같고, 월말고사나 기말고사 같은 시험 아니면

 

다 철필로 원지를 긁어서 문제지를 만들었다.  난 초등학교 4학년때 이미  UN 사무총장이 구르트 발트하임이라는 것을 선생님께 배워서 알고  있었고, 사진도 봤고,,,,,글쎄 그 당시

 

대학생이라도 UN 사무총장이 구르트발트하임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복도끝 한쪽에 있던 등사실 창문에 저녁햇살이 비칠때에야 우리의 시험지 만드는 작업이 대충 끝나곤 했다.

 

 

 

5학년이 되자 학교대표가 되어 고전경시대회라는 대회는 모조리 휩쓸고 다니며 수상을 하곤 했다.  내 4학년때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선생님이 5학년을 맡으면서

 

 우리반 담임이 되어 또 우리 담임선생님이 되셨다.  나중에 선생님은, 널 옆에 끼고 가르치기 위해 5학년 담임을 지원해서 날 데리고 5학년 내가 배정된 반 담임을 맡으셨다고,,,,

 

받은 상장도 휘황찬란해서 내 아버님은 그 상장들을 액자에 넣어 당신의 방 지정된 한쪽벽면을 상장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하셨다. 그 시절 학교도서관에는 우리 학교 졸업한

 

 선배들이, 성공한 선배들이 모교에 기증한 엄청나고 방대한 분량의 좋은 책들이 있었고 그 많은 책들을 나는 프리워크로 마음대로 누비며 서가를 넘나들며 읽고 싶은대로

 

실컷 읽고 보고 싶은대로 실컷보고 만져보고 보존판, 희귀판도 쓰다듬어보고 읽어보고 또 집에 가져가서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책대출을 신청하기만 하면 무조건 승인되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과정을 거의 학교도서관에서 보냈다.  6학년이 되고 새학기가 시작되자 도교육감이 바뀌었는지 시교욱장이 바뀌었는지 "고전경시대회가"가

 

잠잠해졌고 나는 그리고 우리 멤버들은 "고전읽기"에서 다소 자유로와졌다.  초등학교 4,5학년 담임선생님이 "고전경시반" 담당이고 "걸스카우트단장"이어서 걸스카우트

 

브라우니였던 나는 이 선생님과 함께한 추억이 매우 많다.  다른 학생들에게 "안경쓴호랑이"였던 우리 담임 여선생님은 내겐 큰언니나, 이모같은 존재였다.  우리 선생님이

 

걸스카우트 서울출장에 다녀오면 자료를 많이 수집해 오곤 했는데, 서울시내 걸스카우트 단원들이 사용하는 노트와 자료중 잘 된것을 몇개씩 샘플링해서 수집하고 내게

 

그 복사본을 만들라고하셨었다.  복사기도 스캐너도 없던 시절이라 그 자료를 다 손글씨로 복사하고 손으로 그림을 다 베켜서 다시 한 권의 자료집을 만들어 묶기까지 했다,

 

학교에서 다 못한 분량은 집에 가져와서 밤늦게까지 그걸 다 베껴서 쓰고 또 쓰고, 또 그리곤 했다.  요즘처럼 컴퓨터며 복사기며 복합기며 스캐너며 노트북이며 태블릿PC며,

 

모든 사무기기,전자제품들이 다 갖춰진 시대에 사는 요즘 아이들이 우리 나이의 그 고충을 알기나 할까,,,,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줄 알고 묵묵하게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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