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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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Deok Innopolis

신여성 나혜석,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

안젤라Angella 2012. 12. 20. 13:15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마친 신여성이다. 부친은 시흥군수

 

와 용인군수를 지냈고, 그의 집은 "나부잣집"이라고 불리웠으며, 부유한 개화 관료 집안으로 신식교육을 받고 두딸과 두

 

아들이 일본 유학을 했다.  5남매중 네째, 딸로는 두번째딸.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아버님의 축첩으로 어머님의

 

한숨소리를 듣고 자라야 했다.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의  저자인 KAIST 이상경교수는 나혜석

 

의 문학가로서의 모습, 화가로서의 모습, 그리고 여성이기 전에 인간으로 살고 싶었던 나혜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

 

금 이 시간 아직도 여성으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순결"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혜석 그녀가 살

 

았던 시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순결"이었으리라.  그런 시대에 태어나 살던 나혜석은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

 

도 아니오."라고 말한다. 여성도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자도 女子이기 전에 인간이라고 말하고 행동하던 나

 

혜석은 더는 "인형의집"에 갇혀 있을수 없었다.  그녀는 동시대를 살던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삶의 길을 선

 

택했었다.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의 저자인  KAIST 이상경교수는 이 책을 통하여 인간 나혜석, 나혜석의 여성 해방에 대한 생각, 그녀의 독립운동 등을상세히 말해주고 있다.  나혜석에 대해 알고 싶다면, 여성해방 선각자로 혹은 문학가 화가로서의 나혜석을 이해하고 싶다면 읽어봐야할  좋은책이다.

 

누구나 한 번은 살면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것이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그녀의 외침은 인간이 되기

 

원하나 그럴 용기를 갖지 못하는 여성에 대한 외침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고 행동했던 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에게

 

향한 외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실한 삶을 살고자, 신여성으로 남보다 진보적인 길을 걸었던 화가 나혜석은 그

 

녀의 애정행각으로 남편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외침만 남긴채 파란만장한 인생을 끝마쳤다.

 

불꽃이 미쳐 다 타기도 전에,,,,,,.

 

 

 

나혜석 (1896 ~1948) 한국최초의 여성서양화가, 독립운동가

남편 김우영과 결혼할 당시의 나혜석의 모습.

 

전근대사에서 근대사로 넘어 오면서 봉건적인 사회로부터 독립한 개인의 자아를 형성하는 개성의 확립이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시절에 나혜석은 여성화가로서,여성해방론자로서, 그리고 여성작가로서 언제나 자신이 내딛는 한걸음의 진보

 

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뚜렸하게 지니고 있었다. 아직 조선여성 대부분이 근대적 자의식을 가지기

 

는 커녕 그럴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근대적 자아를 확립하고, 자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나혜석에게

 

혜택이면서 한편으로는 커다란 의무였던 것이다.  "다시 나혜석을 만나다"라는 머리말로 시작하는 이 책은 "수원의 나부

 

잣집딸" "일본 유학, 낯선세계로" "청춘, 그 안과 밖"  "자기를 내세우는길" "어머니의 길과 화가의 길" "절정, 여성의 당당

 

한 삶" "구미여행, 진정한 예술을 찾아서" "귀국, 그리고 이혼"  "자기를 잊지 않는 행복"  "날아간 청조"  "세간과 불문 사

 

이"  "다시 타오르는 불꽃" 같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나혜석(1896 ~ 1948)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본

 

관은 나주羅州이고, 아명은 나아지, 나명순이며, 아호는 정월正月이다.  Japan Tokyo여자미술학교 유화과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후, 1918년 귀국하여 화가, 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하였다.  1918년 미술학교룰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와 잠시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냈고,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여 5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

 

났다.  그 뒤 1920년 김우영과 결혼, 그를 따라 만주와 프랑스 등을 여행하였으며 그림, 조각, 언론, 문필, 시등에서 활동

 

했다.  1927년 유럽과 미국 시찰을 가게 된 남편을 따라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

 

를 얻게 되었다.프랑스에 체류하던 중 야수파, 인상주의, 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한 때 여러 남성들과의 연애

 

가 문제가 되었으나 곧 그림활동에 매진하던 중 외교관 최린과의 염문으로 이혼하게 된다.  그러나 뒤에 최린으로부터도

 

버림을 받게 된다. 

 

 

 

1935년 "정조취미론"을 발표하여 "순결과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순결함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어머니, 누이, 딸에게는 성욕을 품는 한국남자들의 위선적인 행

 

동에 대한 비판과 자유연애를 주장하였으며 당사자들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고 집안의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에 대한 비

 

판, 가정폭력을 일삼는 남성들에 대한 비판 등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나혜석이 딸 김나열, 첫째아들 김선, 둘째아들 김진, 세째아들 김건과 함께 찍은 사진.

 

일제 강점기의 유명한 신여성으로 뛰어난 미모와 함께 그림, 글, 시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재주를 갖춘 근대여성이었으며

 

여성해방, 여성의 사회참여등을 주장하였다.  박인덕 등과 함께 이혼후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으로 유명하였다.  한국 최

 

초의 여성 서양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문재文材도 뛰어났으며 일본 유학 때부터 여권 신장의 글을 발표한 여권 운

 

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연기자 나문희(본명 나경자)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2009년 3월 KAIST 이상경교수가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를 집필, 출판한 그 해 봄, KAIST 인문

 

사회과학부 N4-1116호 강의실에서 KAIST 교수와 그 가족, DaeDeuk Innopolis Scientist Researcher와 그 가족을 대상으

 

로 KAIST 인문사화과학부 이상경교수의 특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