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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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DaeJeon

비바람이 몰아쳐도 닭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안젤라Angella 2013. 1. 2. 20:00

 

 

風雨如晦 鷄鳴不己

"비바람이 몰아쳐도 닭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안방준(安邦俊,1573~1654, 조선중기의 학자)이 송시열에게 충효를 실천했던 집안의 사적을 설명해주고

아울러 나이 어린 송시열이 장차 세상에 나아가 가져야 할 삶의 지침을 글로 써 준것.

 

 

 

우암 송시열(1607~1689)  조선 좌의정,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시호는 문정, 송갑조의 아들.  

1607년 선조 40년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8세때부터 송이창의 후의에 힘입어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625년(인조 3)부터 연산에 있는 김장생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1633년(인조 11년) 생원시에 응시하여 논란 끝에 최명길의 지원에 힘입어 1등으로 합격하고 최명길 등의

천거를 받아 경릉참봉이 되었다.  그 후 효종이 봉림대군으로 있던 왕자 시절 스승으로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낙향하여 10년간의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위치한 남간정사.  남간정사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세운 건물이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기용하면서 벼슬에 나아갔다. 

효종 초에 집의에 올랐으나 청나라와 밀착되어 있던 김자점이 영의정으로 발탁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뒤에 김자점 일파가 풀려난 뒤 스승 김집 등과함께 등용되었으나 스승 김집이 대동법의 시행을 반대하다가

이를 추진하던 김육과 충돌하여 시골로 낙향하자 함께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후 후진 양성에 전력하고 서인 사류들이 중심이 되어 인조 대 이후 분열되어 있던 서인세력을 재통합하는 구심점이

되었고, 그의 스승인 반대하던 대동법의 시행이 필요하다는것을 인정하고 군포부담이 소수의 양민에게 집중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호포법의 시행을 주장하는등 세금제도의 개혁을 위주로 한 사회 경제젹인 개혁안을

적극 수용하여이이 이래 서인 세력의 구심이 되었다. 

1658년(효종 9년) 찬선에 등용되고 이조판서에 승진하여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우암 송시열의 초구.  호죵과 독대하여 효종으로 부터 하사받은 갖옷.  효종의 북벌의지와 계획이 담겨 있는 선물.

당시 효종과 독대하여 효종으로부터   갖옷을 하사받고 북별의 뜻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는 현종 이후 그의 권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효종의 장례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삼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에 대하여

기년설을 건의하여 이를 채택케 함으로써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 판중추부사 좌참판 등을 역임하는 동안

서인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1668년 (현종 9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에 기용되고, 다음해 좌의정이 되었다.

 

송자대전.  우암 송시열의 문집 총 215권 102책임.  대전광역시 서구 가양동 우암사적공원 소장.사진이 부옇게 보이는 것은 셔터 누르려는 순간 태블릿PC에서 히터의 열기를 감지하고 반응했던 것.  몇번시도해도 계속 이 상태이고, 실외는 영하 14도 강추위여서 그냥 우암송시열유적관 히터의 열기 흐름을 인정한채로 촬영.

현종 연간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점차 국왕 현종과 긴장이 형성되고 이에 대해 남인들이 유생들의 상소 등을

통하여 공격하고 효종의 능을 옮기는 문제 등으로 인하여 점차 위기를 맞는 가운데서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와

현종이 사망함으로써 이어진 복제문제에서 자의대비의 복제를 대공설(9개월설)을 주장한 것이 문제가 되어 실각하였다. 

그 후 남인이  득세하자 자의대비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한 죄로 여러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으며 1683년 벼슬을 사양하고 봉조하가 되었다. 

이 무렵 다시 등장하여 기대를 모았으나 실제 건의한 정책 등이 서인 소장 사류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상황에서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가 논의될 때 과격한 방법으로 숙청을 도모하고, 1682년 김석주, 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한 임신삼고변 사건 등에서 김장생의 손자라는 이유로 고변을 통한 남인 축출 음모에

가담한 김익훈을 두둔하였으므로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남간정사의 뒷편 언덕에서 남간정사를 내려다 본 모습.  

게다가 이전에 제자인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가 윤휴와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을 비판하면서 관계가 약화되고

윤선거가 죽은 뒤 병자호란에 강화도에서 순절하지 않고 도망한 일을 행장에 그대로 기록한 일로 윤증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훈척들과의 연관 등을 의심하며 윤증의 입장을 지지하던 젊은 사류들이 윤증(尹拯)등을 중심으로 뭉쳐

서인들의 분열이 이루어지자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 은거하였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그도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직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조선조 중엽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초상화.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거유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을 이루었고, 예론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많은 정적을 가졌으나 뛰어난 학식으로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문묘 효종묘정에 배향되고 덕원, 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개소에

이르게 되었고, 그 중 사액서원만37개소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의 칭송고 비방이 무성하였으나,

1716년 병신처분과 1744년(영조 20년)의 문묘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고,

영조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체가 이루어지면서 송시열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