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꽃담, 화려한 여덟 가지 무늬전돌
꽃담의 형식은 이미 삼국시대에 크게 발달을 보았다. 삼국시대에는 주로 무덤 안벽에 무늬를 새긴 벽돌을 쌓아 장식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예로 백제 무령왕릉에는 인동화문과 그물무늬가 새겨진 무늬전돌이 쓰여졌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다양한 문양전이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혹은 무늬전돌을 쌓아 세운 탑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를 전탑(塼塔)이라 한다.
잘 알려진 삼국시대의 회화자료로서 부여시 규암면에서 출토된 백제 때의 산수문전에 새겨진 산경과 가람의 전경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여기에 새겨진 아름다운 산 모양은 이른바 삼산형 이어서 다소 도안화된 분위기를 느끼게 하지만 근경에서 점차 멀어지는 중경, 후경으로 인해
거리감이나 공간감이 느껴진다. 주봉과 객산의 부드러운 연결, 그리고 산봉우리에 소복하게 서 있는 소나무숲을 추상화시킨 우수한 디자인 감각과
운치가 돋보인다. 특히 중앙부에 우뚝 솟은 세 봉우리를 이룬 주산을 병풍삼아 아늑하게 배치된 법당, 그리고 석등을 향해 계곡의 암벽 사이 좁은
산길을 비스듬히 올라가는 승려의 모습에서 서사적인 백제인의 취향을 엿볼수 있다.
매우 부드럽고 곡선적이며 여유만만한 감정을 잘 나타낸 백제의 미술에서 비롯된 선사의 풍정은 이른바 우아한 인간미라는 표현과도 걸맞는다.
산중의 고요한 풍경과 사옥의 풍경을 담은 벽전(壁輾)은 신라에도 있다. 물 흐르듯이 멀고 가깝게 떠 있는 구름 위에 작은 산봉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이 역시 삼산으로 무리지어 표현되고 있다. 그 아래에는 호젓하게 전각이 서 있는 풍경이 새겨졌다. 그런데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모두 삼산을 나타내고자
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삼신산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의 옛 삼신사상과 연관지어 볼 때 민간의 신선사상이 엿보이는 것이다.
부여시 규암면 외리의 폐사지에서 발견된 무늬전돌들은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유적은 1937년 3월 농부가 보리밭을 갈다가 근처에서
문양이 있는 방형전 15매와 와당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당시 일본인 학자가 남북에 일렬로 깔아 놓은 정방형 무늬전돌 30매와
전열의 동쪽에 있는 암키와와 수키와의 퇴적층을 조사한 바 있다.
이 무늬전돌은 백제 말기인 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방형에 가까우며 가로 세로 길이가 29cm, 두께가 4cm로서 네 모서리에는
각기 홈이 파여서 각 무늬전돌을 연결하여 깔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무늬전돌의 표면에는 각각 연화무늬, 와운무늬, 봉황무늬, 반룡무늬, 귀형무늬, 산경무늬등
8종의 무늬가 부조되었는데, 이것을 통해 백제의 문화가 삼국시대 세 나라 가운데서 단연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무늬전돌은 중국 남조시대의 무늬전돌에서 선례를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동진 영화 4년명의 남경시 중앙문 밖의 와전과 매우 관련이 깊다.
그밖에 이러한 계통의 무늬전돌을 오카테라 출토 봉황문전이 있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백제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연꽃무늬전돌
연꽃무늬전돌, 테두리에 거치문 형식의 작은 꽃술에 둘러싸인 커다란 자방을 중심으로 열 개의 연꽃잎이 돌려졌고, 다시 그 화판 사이사이에 간엽이 있다.
화판 끝은 곡선을 이루었는데, 판단의 끝이 위로 말려 안쪽으로 향하였으며, 화판 속에는 인동문으로 내식된 도 한 개의 화판이 부출되어 있다.
자방의 안에는 중앙에 융기된 한 개의 커다란 연자를 중심으로 둘레에 여섯 개의 연자가 둘러지고, 다시 그 둘레에 열 개의 연자가 배치되고 있다.
이러한 커다란 연화문의 주연에는 두 줄의 융기선이 둘러진 안에 주점무늬가 점렬되어 연주문대가 둘러졌다. 전의 네 모퉁이에는 사엽화문을 4등분한
화문을 배치하였는데, 무늬전돌을 사방으로 연속시켰을때 사방연속무늬의 효과를 내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연화문 형식은 통일신라시대의
수막새에 많이 나타나며, 경주 부근의 신라시대 사지에서 발견된 무늬전돌에서 더욱 발전된 형식을 찾아볼 수 있다.
와운무늬전돌
와운무늬전돌, 전의 중앙부에는 굵은 융기선으로 둘러진 원상 안에 8판 간엽의 작은 연화문을 배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외구가 구성되었다.
외구에는 여덟 개의 와운무늬를 추회상으로 연속시켜 둥글게 배치하였고, 다시 그 주연에는 두 줄의 융기선이 둘러진 연주문대가 둘러졌다.
네 모퉁이에는 역시 사엽화문을 4등분한 화문을 배치하고 있다.
이 무늬전돌은 좌우 상하가 대칭 형식을 보이고 있으나 실상은 대칭이 아니며, 그 속에서 무한한 변화를 느끼게 한다.
봉황무늬전돌
봉황무늬전돌, 정방형의 표면에 가득 차게 연주문대로서 이루어진 원곽을 구성하고, 그 원과 내에는 매우 율동적이고 곡선미가 있는 상상 속의 봉황
한 마리가 원곽에 가득 차게 배치되어 있다. 봉황의 머리 형상은 닭의 모양을 하고 측면으로 표현되었는데, 부리는 마치 독수리나 매의 부리처럼 날카롭게
구부러져 포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날개는 중국 한대에 유행되었던 운기문 형식인 C자형 곡선으로 소용돌이무늬전돌에서와 비슷한 표현을 하였는데,
오른쪽 날개는 머리 위로 둥글게 치켜 올라가서 원을 그리고, 왼쪽 날개는 밑으로 향하였다. 꼬리는 머리부터 S자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봉황의 형상은 고구려 금동 투조 관모의 봉황문과 비교하여볼때 좀더 추상적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몸체에는 비늘이 세세하게 표현되고 융기선으로 윤곽을 둘러서 강한 인상을 돋우고 있다. 네 모퉁이에는 여기 사엽화문을 배치하고 있다.
반룡무늬전돌
반룡무늬전돌은 또한 봉황무늬전돌과 같은 구성으로서 방형의 표면에 가득 차게 연주문대의 둥근 곽이 구성되고, 그 내부에 S자 모양으로
크게 곡선을 이루어 율동적이고 소용돌이 모양으로 움직이는 용, 즉 반룡의 형상을 배치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용은 몸체에 비하여 머리 부분을 훨씬
과장하여 묘사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을 느기게 하는데, 눈을 크게 부라리고 입을 크게 벌려 포효하는 형상을 하였다. 꼬리 부분은
크게 원을 그리고 사지를 크게 벌리어 도약하는 모습은 그 시대의 다른 유물에서 볼 수 없는 동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체에는 비늘이 세세하게 표현되었고,
여백에는 역시 운기문이 새겨졌다. 사치의 겨드랑이 밑에는 익모가 휘날리고 발끝에는 세 개의 발톱이 표현되었으며, 머리에서 등에 이르기까지 갈기가 붙어있다.
연꽃받침 귀형무늬전돌
연꽃받침귀형무늬전돌은 연화대 위에 정면으로 꼿꼿이 서 있는 도깨비 형상으로서 전신의 크기에 비하여 머리 부분이 크게 묘사되었는데,
눈은 크게 부릅떠 치켜올라가고 입을 크게 벌려 아래 위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뻗었으며 얼굴 양면에는 갈기와 같이 털이 뻗쳐있다.
가슴에는 큰 유방에 젖꼭지가 크게 표현되었고, 허리에는 환식이 매달린 둘러졌는데, 가운데에는 요패의 긴 수식이 내려왔다. 앞발에는 근육이
울퉁불퉁하게 융기되고 날카로운 발톱이 달렸다. 뒷다리도 울퉁불퉁한 근육과 골격을 나타내었고, 각각 날카로운 네 개의 발톱으로 버티고 서 있는
연화대는 끝이 뽀족한 단관연엽으로서 판단이 약간 내반된 형식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연화문은 매우 고식(古式)한 형식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허리에 둘러진 과대와 요패의 양식인데, 이러한 장신구는 삼국시대 고분 출토품 가운데 다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단의
두 모퉁이에는 삼산형 산봉우리가 구름 위에 솟아있는 형상을 반으로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이와 같은 벽돌을 연결하여 연속무늬로 배열할 수 잇도록 고안되어 있다.
산형무늬전돌
산경귀형무늬전돌, 이 무늬전돌은 앞서 본 귀형무늬전돌의 도깨비 형상을 그대로 배치하고 연화좌 대신에 약 1/2 정도의 하단에
괴석 형상의 해암이 삐죽삐죽 솟아있고 그 아래에는 바다로 생각되는 물결이 있다. 역시 하단의 양 모퉁이에는 삼산형의 봉우리가 반으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문양을 보면 이 도깨비의 형상은 산해와 천지를 장악하여 위압하고 인간을 수호하는 신의 하나로서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귀신, 즉 도깨비 사상은 일찌기 중국 고대 사상에서 비롯되어 도교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불교에 흡스되면서 역시 방위신의 모습으로
고대 유물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중국 남북조시대의 괴수형 금구 에서 이와 매우 흡사한 형상을 볼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경북 경주 노동리의
신라시대 고분인 식리총에서 출토된 청동 식리에 장식된 귀형문이 있다. 이밖에 이러한 전신상의 도깨비 형상 외에 백제 와당의 귀면와라든가 신라시대
안압지 출토의 귀면의 등과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건축도의 두공에서 나타나고 있다.
산경무늬전돌
산경무늬전돌은 8종의 전돌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산경무늬전돌은 백제 고지의 산세를 매우 부드럽고 유연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앞에는 물이 조용히 흐르고 뽀족한 바위가 높고 낮게 솟아 있으며, 그 뒤로는 삼산형의 크고 작고 높고 낮은 연봉이 겹겹이 전개되어
장관을 이루는데, 둥그런 산정에는 송림이 무성하여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 아래 중턱에 기와집 한 채가 있고 그 밑에 오른쪽에는 그 집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가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집은 사찰이 분명하고 그 곳을 향하여 오르는 사람은 그 절의 승려임이 분명하다.
산 위의 좌우에는 뭉게구름이 조용히 흐르는데, 그 정경이 마치 심심산천의 적막한 골짜기를 대하는 듯 하다.
이러한 것에서 다른 어느 민족도 더욱이 현대인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백제인의 슬기로움을 엿볼수 있다.
이 전돌의 구름무늬라든가 산악 형식은 이미 중국 한대에 나타나고 있고, 고구려 고분벽화중 감신총, 무용총, 쌍영총, 강서대묘 등과 특히 내리1호분의
현실 천장 벽화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양식적인 면에서나 조형성으로 보아서 별개의 작의를 엿볼수 있고, 여기에서 비로소 한국적인 특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늬전돌의 산형과는 재료에 따른 기법상 다소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만, 충청남도 공주 백제 무령왕릉 출토 동탁은잔에 새겨진
산악 그림에서도 이러한 산형이 뚜럿이 나오고 있어서 아마도 백제인의 삼산사상 또는 삼신사상과도 관련되지 않나 생각된다.
산경봉황무늬전돌
산경봉황무늬전돌은 산경무늬의 일종이나 앞서의 것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약 1/2쯤 하단에 산수 풍경을 부조하고, 상단에는 중앙의 산봉에
우뚝 서 있는 신조와 그 주위로 멀리 보이는 산과 구름, 그리고 보운문이 구성되었다. 근경에는 산 앞으로 안개구르이 겹겹이 흐르고 산 중턱에는 산과 산 사이로
집이 두어 채 보이는데, 이 역시 절이 분명하고 집 앞에는 당간지주가 기단 위로 우뚝 서 있다. 또 앞산의 뒤편 송림 속에 약간 가려진 집은 누각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백제 건축을 연구하는 큰 자료가 될 것이다. 산의 정상에는 봉황이 앞 날개를 벌려 하늘을 향하고 정면을 향해 우뚝 서 있다.
여기에서의 구름 형상은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안악 3호분 천장받침에 나타난 당초문 형식의 조운문에서 많은 연관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면은 당시 삼국이 각기 고유의 특색있는 미술을 남겼으면서도 서로 종(縱)으로 횡(橫)으로 문화교류가 많았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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