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술에 나타난 여러 종류의 새무늬
통일신라시대 와당과 뼈항아리에는 학, 제비, 오리, 기러기 등을 비롯한 철새들이 많이 등장하며, 고려시대 이후에는 자연 풍경을 소재로
매우 다양해진다. 이 시기문양을 통해 선종의 성행과 더불어 유유자적하고 은유한 생활을 동경하였던 풍토를엿볼수 있다. 운학문(雲鶴紋) 을 비롯하여 포류수금
또는 위로수금 등 갈대숲과 수양버들이 있는 강변의 물새와 철새때의 한가로운 풍경은 지식인들의은둔사상을 대변한다. 해오라기(학)은 예전부터
"태양새"이며 장생을 상징하는 새이다. 또한 구름도 역시 장수(長壽)를 상징한다. 따라서 운학(雲鶴)은 "학수(鶴壽)라 해석한다.
조선시대 문인화와 민화에 나타나는 조류에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이 많다. 예를 들자면 해오라기 한 마리가 연잎에 앉아 있는 연당을 그린
그림이 있다고하자, 이 그림의 뜻은 "일로연과"이다. 일로(一露)는 일로(一路)로, 연과는 연과로 해석하여 "한 걸음에 항시와 전시를 연속해서 등과"
할 것을 기원하는 그림이 되는 것이다. 또 닭을 그린 그림도 더러 볼 수 있는데, 천계도와 계도 등으로 부른다. 장닭을 그린 그림은 공명도라 한다.
장닭은 공계(公鷄)라 하니, 공(公)은 공(功)과 같고, 명(鳴)은 명(名)으로 읽는 것이다. 또 갈대밭에 앉은 기러기 그림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를 노안도(露雁圖)라 하는데, 이는 "노안(老安)"과 상통하여 갈대와 기러기로 "편안한 노후"를 의미하고 있다.
또, 우리 민속에는 흔히 까치가 새벽에 문 앞에서 울면 기쁜 소식이 있다고 믿어온다. 매화가지에 까치가 앉은 그림이 있는데, 매화는 이른봄에 피니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고 까치는 기쁜 소식을 알리므로 이러한 그림을 "희보춘선"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까치호랑이그림"이라 하는
그림이 있다. 민화뿐 아니라 청화백자에서도 보인다. 이 역시 보은(報恩)을 의미한다.
청자상감운학문모란베개, 고려시대, 12세기
장수를 상징하는 새, 학(鶴), 자연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새임에도 불구하고 옛사람들은 학을 매우 신비스럽고 영적인 존재로 인식하였다.
옛 문헌에 "학은 양의 새이다. 16년에 소변하고 60년에 대변한다. 2년에 잔털이 떨어져 검은 점으로 변하고 3년에 머리가 붉게 변한다.
7년에 은하수를 치고 날며 또 7년에 춤을 배우고 다시 7년에 절도를 터득하다. 밤과 낮으로 12번 울며 60년에 큰 털이 빠지고 뭇 털이 무성해진다.
깃털은 눈같이 희어서 진흙탕에도 더럽혀지지 않는다. 160년에 암수가 서로 만나 눈을 마주쳐 주시하면 잉태한다. 1600년 동안 물을 마시지만
먹이는 먹지 아니한다. 물을 먹기 때문에 부리가 길며 앞은 훤칠하고 뒤는 짧다. 땅에 깃들이기 때문에 다리가 길고 꼬리는 추레하다.
구름 위를 날기 때문에 털은 풍성하나 몸을 깡말랐다. 갈때는 물가에 의자하며 그칠 때는 반드시 수풀에 모인다.
날개 달린 동물의 우두머리이며 선인이 타고 다닌다"고 하였다.
학은 정통 회화나 민화 가릴것 없이 널리 그려졌다. 공예품에 나타나는 무늬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나무와 학의 관계는 기러기와 갈대, 백로와 연꽃의 관계처럼 정형화되어 있다. 소나무와 학이 서로 짝을 짓게 된 것은 "학수천년 송수만년"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오랜 옛날부터 길상 관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과 소나무를 그린 "일품대부"라는 만화가 있는데, 여기서 일품이란 말은
학이 새들의 우두머리이기도 하거니와 옛날 중국 진시황제가 소나무에 대부의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와 관련하여
문관 일품의 복장에 학의 문양을 쓴 데서 연유한 것이다.
새(봉황)장식은비녀
애란의 새, 앵무, 신라시대 흥덕왕이 몸소 지었다는 "앵무가"를 통해 앵무가 이즈음에 서방에서 전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앵무가"를 짓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당시 당나라에 갔던 사신이 앵무 한 쌍을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바쳤다. 얼마 안 도어 , 암놈이 죽자 홀아비가
된 수놈이 짝을 찾으며슬피 울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왕은 사람을 시켜 앵무새 앞에 거울을 걸어놓으라고 했다. 짝 잃은 앵무새는 거울 앞에 비친
제 그림자를 아무리 쪼아도 응답이 없자 이내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슬피울다가 죽었다. 왕은 이를 보고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유제 제이 계이(鷄苡), 조선시대, 19세기
때와 시를 알리는 가금, 닭 닭은 때를 아는 가축이라 하였다. "역경"에는 닭이 팔괘의 손에 해당하는 동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손괘의 방위는 동남쪽이다. 닭이 팔괘의 손에 해당하는 동물로 기록되어 있는데, 손괘의 방위는 동남쪽이다.
이 방향은 여명이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에 닭은 희망찬 출발이나 상서로움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궁륭천장속에 표현된 하늘세계의 일부분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무용총의 궁륭천장에는 하늘세계가 그려져 있는데, 가운데에 큰 신수가 잇고, 그 아래 나무를 사이에 두고 큰 새 두 마리가
마주 대하고 앉아 있다. 이 새를 봉황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고대 설화를 볼 때 이 새는 분명히 봉황이 아닌 천계를 나타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옛사람들은 닭이 울면 모든 잡귀들이 사라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벽사의 의도로 닭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닭이 신격화되어 있었음을
시사하는데, "희남자"에서 "천계가 있어 해가 뜰 때 울면 천하의 모든 닭들이 따라 운다."라고 한 것과 관련해 본다면
벽사용 문양에 등장하는 닭은 보통의 닭이 아니라 천계에 있다는 신비스러운 천계로 볼 수 있다.
또한 닭은 예로부터 문, 무, 용, 인, 신의 오덕을 갖춘 덕금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머리에 관(볏)을 쓰고 있으니 문(文)이요, 발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어
무요, 적을 맞아 물러서지 않고 죽을때까지 싸우니 용이요, 음식을 보면 혼자 먹지 아니하고 함께 먹으니 인(仁)이요, 밤을 지키되 그 때를 잃지 않으니
신(信)이라 했다. 특히 수탉이 큰 소리로 우는 모습을 그린 문양은 공계명 곧 공명을 의미하며 수탉을 가리키는 한 자 웅(雄)은 영웅 웅자를 써서
용맹한 기상을 상징했다. 중국에서는 계(鷄)의 발음이 길(吉)과 유사하다하여 닭을 길상의 상징으로 여겼다.
혼인할 때 화려한 수탉을 보내는 것은 혼인을 축하하고 길상과 이로윰을 축원하는 뜻이다.
덕망의 새, 공작 공작은 아홉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첫째 모습이 단정하고, 둘째 목소리가 맑고 깨끗하며, 세째 걸음걸이가 조심스럽고
질서가 있다. 네째 때를 알아 행동하며 다섯째 먹고 마시는데 절도를 알며, 여섯째 항상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안다. 일곱째 나뉘어 흩어지지 않으며
여덟째 음란하지 않으며, 아홉째 갔다가 되돌아올 줄 안다. 사람들은 공작이 갖고 있는 이러한 아홉가지 미덕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림의 본,
여러 기물, 건축, 도안 등에 공작무늬를 사용하였다. 또한 "본초강목"에 공작의 작(雀)은 작(爵)과 같은 글자라 하였다. 작(爵)은 고대 동제주기의
하나로 공작 모양을 본 뜬 것이라고 한다. 또한 공작은 우는 소리가 "절절족족"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중용(中庸)의 덕을 터득한 새로 여겼다.
공작은 흔히 학, 꿩고 함께 그려 위열삼대의 의미를 나타내었는데, 학은 일품관, 꿩은 이품관, 공작은 삼품관의 예복 휘장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관운형통의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옥로(玉鷺), 조선시대, 19세기
청백의 상징, 백로 예전에 선비들은 갓끈에 패영, 즉 굵은 콩알만 한 호박을 실에 꿰어 턱 아래서 매듭지어 길게 드리웠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갓의 정수리에 옥로(玉露)라는 것을 달았다. 옥로는 일명 "옥정자"라 하였는데, 굵은 상수리만 한 크기의 옥을 다듬어
백로 한 쌍을 깊숙이 입체감 있게 깎아 새겼다. 그 아래 둘레로는 실을 꿰맬수 이쓴 구멍이 듬성듬성 뚫려 있다. 백로는 하얀 새이고, 옥은 해맑으니
청백(淸白)한 선비의 정신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목민관 중에서도 당상관이라야 옥로를 달 수가 있었으며, 또 사신으로 외국에 나가는 관리는
옥로를 썼다고 한다. 백로는 백색의 고고한 자태, 고고하고 은근한 멋을 추구하는 듯한 모습으로 인해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백로는 연밥이나
갈대와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백로 한 마리는 일로(一路)를 의미하고 연밥은 연과(蓮菓)를 의미한다. 따라서 백로와 연밥을 그린 그림은
일로연과 곧 한 번에 과거에 급제한다는 뜻을 지녔다. 갈대가 어울린 경우도 마찬가지로 갈대 로(蘆)가 길 로(路)의 뜻으로 여겨졌다.
원앙모양토기, 원삼국시대(가야), 5세기
부부애의 상징, 원앙(媛), 암컷인 앙(鴦)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원앙을 읊은 노래가 "시경" "소아" 원앙편에 처음 보이는데,
"원앙새 날아들자 그물쳐 잡으려 하나. 군자님은 영원토록 복을 누리시겠네"라고 노래하였다. 또 진의 장화가 지은 "금경"에서는 "원앙은 짝을
지어 사는 새이다. 아침에 서로 기대다가 저녁에 짝을 찾는데 그것은 자기네끼리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한 쌍의 원앙은 어느 한 쪽을 잃더라도 새로운 짝을 얻지 아니한다고 하여 민간에서는 부부간의 정조와 애정 또는 백년화목의 상징으로 여겼다.
원앙은 날 때 암수가 서로 어깨와 날개를 나란히 한다고 하는데 수컷이 오른쪽을, 암컷이 왼쪽을 지킨다고 한다.
이런 뜻에서 원앙 문양이 들어 있는 이불과 베개를 사용하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인연을 맺는다는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특별히 신혼부부의 금침을 원앙피, 원앙침이라 부르며, 이 경우 원앙은 대부분이 쌍을 이루고 있다.
청동은입사버드나무갈대물새풍경무늬정병, 고려시대, 12세기
백년해로의 상징, 기러기 기러기는 봄에는 북으로 날아가고 가을이면 남으로 이동하는 철새라서 계절 변화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민간에서는 "비안언년"의 뜻을 담아 기러기를 그려 병풍으로 장식하였다. 기러기는 안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반려와 음양지의를 뜻하기도 하는데, 무리를 지어 살다가 자웅이 일단 짝을 이루면 평생토록 다른 배우자를 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할 때 전안례를 치르는 것은 기러기같이 백년해로하여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기러기를 썼는데
위데 나무기러기로 대체하였다. 옛날에는 혼례 전에 신랑이 정성을 다하여 나무 기러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무늬에 나타나는 기러기를 보면 갈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 많은데 이는 노년에 들어서도 평안하라는 뜻을 갖는다.
갈대와 기러기를 한자로 표기하면 "노안(蘆雁)"이 되는데 이를 노안(老安)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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