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서해안은 평야가 발달해 있으며, 밀물이 높아 올라온다. 따라서 예전에는 하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밀물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오는 배가 많았다. 한강은 서울까지, 영산강은 영산포 부근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강경천의 미내다리 10m 부근에는
바윗덩어리가 하나 있는데 밀물 때는 물에 잠기고 썰물 때는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강경 시가지는 해발 고도가 10m도 되지 않는다.
"택리지"에는 바닷물이 내륙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글이 적혀 있다.
"부여나 은진에서 비로소 바다 조수와 통하여 백마강 이하 진강 일대에 모두 배편이 통한다. 그런데 은진의 강경 한 마을 만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바다와 육지 사이에 위치하여 금강 남쪽의 들판 가운데 하나의 큰 도회가 되었다. 바닷가 사람들과 모두 이 곳에 모여 물건을 가지고 와서
교역한다. 계룡산 동쪽은 공주 대장촌이고 서쪽은 이산과 석성 두 고을이며, 남쪽은 연산과 은진 두 고을이다. 이 네 고을은 경천촌과 통하여
한 들판이 된데다 바다 밀물이 강경으로 드나들므로 들판 가운데 여러 냇물과 골짜기에 배가 통행하는 이로움이 있다. " (팔도총론 충청도 공주목)
"강경은 은진 서쪽에 있다. 이 들판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강가에 우뚝 솟다 동쪽을 향하여 두 줄기 큰 냇물을 좌우로 받아들였다.
뒤로는 큰 강을 등지고 조수(밀물)과 통하였는데, 물맛이 그리 짜지는 않다. 마을에 우물이 없어 집집마다 큰 독을 땅에 묻어 두고
강물을 길어 독에 붓는다. 며칠 지나면 탁한 찌꺼기는 가라앉고 윗물은 맑고 시원하며 비록 여러 날이 지나도 물맛이 변하지 않는다.
오래 들수록 더욱 차가와지며 몇십년 동안 장기로 병을 앓던 자도 일 년만 이 물을 마시면 병의 뿌리를 뽑는다." (팔도총론 충청도 공주목)
조선 시대에는 이 물길을 따라 상업이 발달하였다. 많을 때는 강경항에 수백 척의 배들이 떠 있었다.
강경은 대동강을 끼고 있는 평양, 낙동강을 끼고 있는 대구와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시장의 하나였다. 강경은 육지 깊숙이 들어온 곳에
위치하여 상업 도시로 성장하였다. 금강을 낀 강경벌에서 가장 높은 옥녀봉을 중심으로 항구와 시장, 시가지가 발달하였다.
"택리지(擇里志)"에서는 "살기좋은곳"에 대해서"어찌하여 생리(生利)"를 논하는가",,,,,,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미 음식 대신에
바람을 들이마시거나 이슬을 마시며 살 수 없게 되었고,의복 대신에 깃을 입고 털로 몸을 가릴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입고 먹는 일에 종사하지 않을수 없다. 제물은 하늘에서 내려오거나땅에서 솟아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는 땅이 기름진 곳이 으뜸이고, 배와 수레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곳이 그 다음이다.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이 적어서
수레가 다니기에는 불편하다. 그래서 온 나라의 장사꾼들이 모두 말에다 짐을 싣는다.그러나 길이 멀면 옮기는 비용은 많이 허비하면서도
소득은 적다. 그러므로 배에다 짐을 실어 옮겨서 교역하는 이익보다는 못하다(복거총론 생리)" 라고 정의하였다.
현재에는 하천 지형의 변화와 인문적인 조건의 변화로 하천 교통이 거의 사라졌지만 원래 한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 등의 하류에서는
집과 사람을 싣고 오가는 배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쌀을 비롯한 물자의 수송에 열차가 이용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자동차의 증가와 도로 건설로 수운의 필요성은 한층 줄어들었다.
거기다가 1980년대에 건설된 금강 하구둑은 황해와 금강 사이의 수운을 완전히 막고 말았다. 이 때문에 더 이상 서해에서
강경으로 새우를 실은 배가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정부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이들에게 태안반도의 간척지 땅을 주었다고 한다.
어부들이 그물 대신에 삽과 괭이를 잡게 된 것이다. 기능을 잃어 버린 강경의 등대는 철거되었다.
그러나 강경은 아직도 과거의 전통을 끈질기게 이어 여전히 새우젓을 사러 강경으로 오는 관광객이 많다.
이는 새우를 바다에서 자동차로 운반하여 옛 명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서 내려다본 미내다리
미내다리의 명칭은 강경천을 미내라고 부른데서 연유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조암교 혹은 미교라고 한다.
본래 이 다리는 바로 인근인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산양리에 있었지만, 지난 2000년 다리를 해체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처음 축조 당시에는 지금처럼 무지개 모양의 홍예교가 아닌 평교(平橋)였다고 한다. 은진미교비에 따르면 조선시대인 1731년(영조 7년)에
강경촌에 살던 송만운이 주동이 되어 황산사람 유부업, 중경원, 설우청원 3인과 여산의 강명달, 강지편이 재물을 모아 1년 만에 전라도와
충청도를 잇는 현재의 다리를 축조하였다고 하는데, 당시는 3난 제일의 대교였다고 한다. 은진미교비는 자연석으로 된 비석으로 과거
미내교 옆에 있다가 파손되어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화강암을 사용했고, 길이 30m, 폭 4.5m 이다.
3개의 홍예가있고, 받침을 긴 장대석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홍예석을 둘러 만든 형식이다. 가운데 홍예를 다리 난간 밖으로
돌출시켜 호랑이 머리를 선각하였고, 북쪽 홍예의 정상부 종석 돌에는 용머리를 새겼다. 남쪽의 홍예부 정상부에는 조각이 없다.
미내다리는 민간ㄷ의 소용에 따라 물자를 모으고, 힘을 합해 지어 물자의 소통을 원활히 하는데 큰 구실을 한 다리이다.
더욱이 돌다리를 놓는 일은 당시에는 웬만한 경제적인 기반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니만큼 강경장과 강경 포구의 경제력을 짐작하게 하는
유적이다. 조선시대 영, 정조 때에 꽃핀 경제적인 번성의 한 중심지로서 강경의 모습을 대변해준다.
화강암 재질로 만들어진 돌다리, 미내다리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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