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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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위성당,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품은 고딕양식

안젤라Angella 2013. 6. 16. 07:00

 

 

 

강경을 지나 익산을 향해 차를 타고 달려가다 보면, 금강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평야 한가운데 사발을 엎어놓은 듯

 

작은 산이 있다.   이 산의 이름은 "화산(華山)", 우암 송시열이 이름 붙여준 곳이다.   이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는 광장 같이 너른 바위,

 

소위 "나바위"가 펼쳐진다.  이곳에 자리 압은 "화산천주교회"의 별칭,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하구로 부터 거슬러 올라오자면 황산포(지금의 강경)가 가장 큰 포구였고, 나바위는 황산포를 3킬로미터 가량 남겨 둔 한적한 곳이었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국가의 긴급한 소식을 전하던 봉화대(통신제도)가 산위에 있었고, 정부미를 실어 나르던 창고가 있어서 나암창이라고도

 

하였다.   나바위 바로 발끝을 금강물이 넘실거리며 흘렀다고 한다.  성당 뒤로 괴석들이 웅크리고 있는 바위동산 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옛날 바다였던 이 곳은 뻘이 쌓여서 푸른 벌판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이 근처가 바다여서 작은 배들이 왕래했다.

 

 

 

이곳에 1845년 10월 12일밤 중국에서 사제가 된 김대건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얹어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나바위 성당을 들어가는 길에서 성당을 보면 높이 솟은 종각이 위엄을 보여준다.   아래서 보면 작은 성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성당 뜰 안에 들어가면 아늑한 정원이라는 느낌으로 반전된다.   더욱이 벽돌식 종각 뒤에 숨겨져 있는

 

기와 얹은 회랑은 한옥을 연상케 하여 더욱 편안한 느낌을 준다.

 

나바위 성당은 김대건 신부 일행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베르모렐(Vermorel)신부"가 1897년에 설립해 1906년

 

(고종 광무 10년)에 성당 건물을 완공하였다.  1916년에는 목조벽을 벽돌조로 바꾸고 고딕식 벽돌조 종각을 증축했다.  한옥 목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성당은 특히 회랑으로 인하여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어 사적 제 318호로 지정돼 있다.

 

 

 

나바위 본당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서북지방에 있는 공소를 관할했다.   1929년 당시엔느 전국에서 가장 큰 본당으로 신자수가 3,2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나바위 성당은 1907년 계명 학교를 세워 1974년 페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애국 계몽 운동을 통한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6.25 당시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사가 계속 봉헌된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1949년부터는 간이진료소라 할 수 있는 시약소를 설립하여 1987년 폐쇄될 때까지

 

가난한 농민들의 건강을 돌보아 왔다.   이처럼 나바위 성당은 이 지역의 정신적인 중심지로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나바위성당의 건축, 고딕식 벽돌조 종각, 1906년 만들어진 부분이다. 

 

 서양미술에서는 고딕양식"이라고 해서 중세 후기 (13세기) 유럽에서 처음 붐이 일어난건축 양식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근대 문물이

 

들어오면서부터 적용되는 양식이 되었다.  성당에 고딕 양식이 많이 쓰이는 이유는

 

세로로 긴 구조 때문에 하늘과 더 가까와진다는 의미 때문일 것이라고 판단된다.  

 

 

 

기와를 얹은 한옥 목조건물의 회랑, 회랑이란 사원이나 궁전건축에서 주요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를 말한다.  이 성당은 벽이 벽돌로 쌓여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기다란 기와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대 한옥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남녀 자리 구분의 흔적,  본당 내부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한국 풍속을 따른 듯 남녀 교우가 서로 구별하여 앉게끔

 

남녀 입구가 다르고 앉는 곳도 칸막이로 막았는데, 지금도 그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신부.   성인, 본관은 김해, 영세명은 안드레아이다.  충청남도 당진군 우강면 출생.

 

증조부 진후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1814년 순교하고, 아버지 제준도 1839년 기해박해때 순교하는 등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7세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836년(헌종 2년) 프랑스 신부 모방(P. Maubant)에게서 영세를 받고 예비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하였다. 

 

 

 

 

역관 유진기에게 중국어를 배운후, 모방의 소개장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조선 전교의 책임을 진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칼레리 신부로 부터 신학을 비롯한 여러가지 새로운 서양 학물과 프랑스어,

 

중국어, 라틴어를 배웠다.   1842년 수업을 끝낸 다음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고국에 밀입국을 시도하였다.

 

 

 

 

처음 의주를 거쳐 서울로 향하다가 감시가 심하여 되돌아갔고, 얼마 후 페레올 주교로부터 고국에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번에는 두만강변 경원을 거쳐 입국하려다가 또 실패하고, 바쯔자로 돌아가 매스트로 신부 문하에서 신학을 연구하였다.

 

1945년(헌종 11년) 단신으로 국경을 넘어 서울 잠입에 성공, 천주교 대탄압 이후 위축된 교세확장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다시 프랑스 외방전교회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금가항 신학교에서 탁덕으로 승품하여 한국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되어 미사를 집전하였다.

 

8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주교와 함께 상하이를 떠나 충청남도 강경에 잠입하여, 서울을 향하여 각지를 순방하면서 비밀리에

 

신도들을 격려하고 전도하였다.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선교부와의 연락을 위한 비밀항로 개설을 위하여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전후 6회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선교부와 신부들에게 보내는 편지 및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쓴 후 25세로 순교,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되었다.   1857년(철종 8년)에  교황청에 의하여 가경자로 선포되고, 1925년 교황청에서 시복되어

 

복자에 오르고 1984년 4월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시 시성되어 성인위에 올랐다.

 

 

 

 

김대건 신부가 당시 입국하였을 경우 천주교 사회는 암담했다.  

 

 1784년 세워진후 첫 신부를 맡았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6년 만인 1801년에 순교했고, 그 뒤 33년간 조선교회에는 사제가 없었다.

 

다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을 맞이했으나 그나마 1839년에 모두 잃었다.   그리고 6년 동안 또다시 한국 교회는 한 명의 사제도 없는

 

암흑기를 지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인 신부 김대건이 입국하였다.  귀국한 지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함으로써

 

비록 고국에서의 사목 활동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 교회의 또 다른 역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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