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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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재, 홑처마 팔작지붕 밀양손씨 문중 재실

안젤라Angella 2013. 10. 28. 07:00

 

 

 

수정재는 밀양손씨 중시조로 황강도역승(黃江道驛丞)을 지낸 손석을 비롯한 문중의 선대 묘소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실이다.

 

대전광역시 서구 변동 250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수정재는 1992년 7월 22일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수정재라는 이름은 재실 뒷산이 수정암이라 불렸던 것에서 유래한다. 재실은 시조묘가 있는 곳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음식을 만들고 제관들의 숙식을 위해서 지어진 건물을 말하는데, 이외에도 유생들이 공부하기 위한 서재로 이용되기도 하고,

 

마을의 공동 사랑방 구실을 해 문중 젊은이들에게 공부방으로 제공되기도 하였다.

 

 

 

 

수정재의 처음 건축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에 있던 건물은 1945년에 대부분 불타고 그후 1966년 종중의 결의에 따라 이듬해 그 자리에 다시 지었다.

 

당시 규모는 재실이 23칸, 재청이 10칸, 동재·서재가 각 4칸, 문간채가 5칸이었다.

 

그러나 최근까지 재실에 사람이 살면서 부분적으로 모습이 변하였다.

 

그후 1992년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 1994년 수정재, 1995년 동서재, 1996년 삼문과 담장이 각각 중수되었으며,

 

1997년에는 문화재 보호구역인 수정재 뒤 야산의 수종갱신 및 조경사업 등이 이루어졌다.

 

 

 

손석의 장인은 고려 말에 전서(典書)를 지낸 임건(林騫)이다.

 

충주인 박진은 임건의 큰사위로 손석과는 동서지간이었다.

 

임건의 딸과 혼인하면서 대전에 정착하게 된 밀양손씨와 충주박씨는 이웃해 살면서 대전의 중요 성씨를 이루었다.

 

지금도 양 성씨의 후손들은 중구 침산동에 있는 임건의 묘소를 함께 돌보고 있다.

 

 

 

수정재 건물은 전체적으로 엄격한 좌우 대칭이다. 이러한 배치 형태는 향교나 서원, 반가 등에서 적용해 오던

 

배치법으로, 재실의 넒은 마당은 제사, 향사 등에 많은 사람이 모여 일할 수 있는 구조이다.

 

 바깥마당으로 향하는 수정재의 솟을대문은 행랑채와 붙어 있고 이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 있다.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북쪽에 남향한 재실을, 재실 앞 좌우로는 동재와 서재를 배치하였다

 

 

 

 

솟을대문을 가운데 두고 지어진 행랑채는 측면 1칸에 맞배지붕 구조이다.

 

중심의 삼문 좌우에는 전면 1칸 규모의 온돌방을 하나씩 두었다.

 

그 다음 칸은 아궁이를 겸한 화장실 및 창고가 이어져 좌우 대칭을 이룬다.

 

밖에서 행랑채를 보면 방벽에 붙은 2개의 고창만 있어 폐쇄적으로 보이나

 

안마당에 들어서면 문이 없거나 띠살문을 달아 개방적이다.

 

대문에는 효원문(孝源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재실인 수정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3칸통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는 각각 1칸통의 온돌방을 꾸몄다.

 

 온돌방 동서 옆면에는 툇마루를 달았고, 남쪽에 아궁이 함실을 두었다.

 

창호는 대청의 앞면 3칸에 띠살 분합문을 달고 양측면에서 띠살 외문을 하나씩 달아두었다.

 

온돌방 양 옆에는 아궁이 함실 때문에 높이 올라간 분합 띠살창이 달려 있다.

 

대청의 뒷문은 판자를 끼운 골판문을 각 칸에 달았고, 대청과 방 사이에는 띠살문과 아자문을 하나씩 달아 놓았다.

 

 

 

 

수정재 앞 좌우의 동재·서재는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동재에는 제명실(齊明室),

 

서재에는 귀연재(歸燕齋)라는 현판을 각각 달았다.

 

동재·서재는 똑같이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열은 반칸 너비로 하여 툇간으로 삼았다.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막돌로 덤벙주초를 삼았으며, 내부는 모두 통칸에 우물마루를 깔았다

 

 

 

 

수정재 뒤 야산에는 손석의 묘를 비롯한 그의 후손들의 묘가 있다.

 

전에는 도솔산에서 이어진 나즈막한 야산이 수정재를 감싸고 있었고 앞으로는 조그만 개천이 흘렀다.

 

그러나 최근 개설된 서부간선도로와 함께 수정재와 묘소 주변은 사방으로 도로가 난 상태이다.

 

제일 위에 손석의 묘가 있고 그 아래로 큰아들 영조, 둘째아들 흥조의 묘 등이 차례로 자리잡았다.

 

역승공묘에는 한쌍의 망주석과 문인석 외에 근년에 제작된 한쌍의 망주석과 묘비가 서 있다.

 

두 눈이 퉁방울처럼 표현된 문인석은 머리가 매우 크게 조형되어

 

인체 비례와는 맞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오래된 형식을 보인다.

 

 

 

 

역승공묘에는 외손인  백호 윤휴의 아버지 윤효전이 찬하여 세운 작은 비갈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글자가 흐려지고 비가 토막나 알아보기 힘들자 부근에 묻었다.

 

지금 서 있는 비석은 1964년에 안붕언이 짓고 전재환이 써서 새로 만든 것이다.

 

아들 영조의 묘에는 마멸되어 알아보기 어려운 묘갈과 근년에 제작된 비석이 함께 세워져 있다.

 

수정재에는 해마다 음력 3월과 10월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문중 사람들이 모인다

 

 

                                                                                                                                               수정재 마당엔 의암 손병희선생 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수정재 네거리에서 수정재를 바라본 사진.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글자가 흐려지고 비가 토막나 알아보기 힘들자 부근에 묻었다.

 

지금 서 있는 비석은 1964년에 안붕언이 짓고 전재환이 써서 새로 만든 것이다.

 

아들 영조의 묘에는 마멸되어 알아보기 어려운 묘갈과 근년에 제작된 비석이 함께 세워져 있다.

 

수정재에는 해마다 음력 3월과 10월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문중 사람들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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