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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건축의 미학이 느껴지는 "돈암서원"

안젤라Angella 2008. 3. 15. 00:02

 

 

 서원 건축의 미학이 느껴지는 "돈암서원遯巖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는 서원書院으로, 1634년에 사제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그의 학문을 잇기 위해 연산면

하일리에 창건되었다.  1659년 국가로부터 사액 허락을 받고, 1660년에 "돈암"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돈암서원은 예학을 대성한

사계 김장생을 모심으로써 창건과 함께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예학의 산실이 되었다.  현재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이

향사되어 있다.

 

 

 

  사원은 동향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펼쳐진 일대의 들판은 내다보고 있다.  서원내의 건물로는 유경사, 양성당, 응도당, 장판각, 정회당,

산앙루, 내삼문, 임덕문 등이 있다.  서원 뜰에는 서원의 사적비가 후손인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전에, 송시열의 그림, 송준길의 글씨다.

 

 

 

  돈암서원은 본래 현재의 위치에서 서북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아 홍수로 서원에 물이 들어오자, 1880년

(고종17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이전하기 전인 창건 당시의 건물 배치는 사우앞에 강당인 응도당을 건립했는데,  이전된 건물배치는

건립 당시와 다르게 사당 앞에 강당인 양성당이 있고, 본래 강당이던 응도당은 양성당 앞마당 우측에 있다.  현재 양성당 편액을 달고 있는

강당 건물은 원래 응도당으로서, 이건 이전의 건물배치와 기본적으로 일치하는데 다만 현재의 강학 공간에 서재인 거경재와 정의재가

생략된 점이 이전과 다르다.  이는 이건하는 시기에 전국적으로 서원의 강학기능이 약화되고 반면 유림 세력의 근거지로서 제향공간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돈암서원은 평지에 세워지는 서원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건축공간의 미학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다른 서원과 마찬가지로 돈암서원의

사당도 서원 경내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외삼문-강당-사당은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사당 일곽, 내삼문과 강당 사이의

공간, 강당, 강당 앞마당, 그리고 외삼문을 지나 멀리 들판 너머 옆으로 길게 펼쳐지는 안산에 이르기까지, 중첩되며 계속 이어지는 외부

공간은 우리나라 서원건축이 엮어 내는 공간 구성 기법의 백미에 속한다

 

 

    응도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 비교적 규모가 큰 형태이며, 후면의 좌우 1칸은 마루방을 두고, 중앙부 좌측도의 마루방을 두었으며,

그 이외의 부분은 대청을 들여 넓은 공간으로 처리하여 출입등을 용이하도록 하였다.  구조는 화강석의 장대석(1단 또는 2단)의 기단에

원통형의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설치한 구조로서 익공은 주심포작 계통의 1출목 삼포작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창방을 두어

주심도리를 받고 있는 화반의 치목등 공포 부재의 치목 수법이다.  지붕은 겹치마 맞배 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정면의 좌우끝에 회랑을 두고

간략한 구조로 된 지붕을 설치한 게 특색을 이루고 있다.  

 

 

  양성당은 사계선생이 1602년 이후 벼슬을 그만 두고 강학을 하던 건물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 크기의 평면으로 만든 후, 정면 5칸중 중앙 3칸에

전퇴가 달린 우물마루의 마루방을 만들어 대청으로 상요하고 있고, 마루방 좌우편에 1간씩 온돌방이 있다.  우측방은 거경재, 좌측방은 정의재라

현판이 걸려 있다.

 

 

 

  * 김장생(1548 (명종3)-1631(인조9)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  선조때 서인西人의 중진인 계휘의 아들.  효종 때의 예학사상가인 김집의 아버지.  이이와 송익필의 문인.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1578년(선조11) 유일로서 (학행) 천거되어 창릉참봉에 임명되고, 임진왜란 중에는 정산현감으로 있으면서 피란온 사대부들을

구휼하였다.  1596년 호조정랑이 되어 남하하는 명나라 원군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다.

  난 이후인 선조말, 정인홍이 선비들을 탄압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에 내려와 양성당을 지어 도를 강의했다.  광해군대에는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여

단양, 남양, 양근, 안성, 익산, 철원 등을 맡아 다스렸다.  철원부사로 재직한 1613년(광해군 5)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페모논의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는 속에서 더이상의 관직을 포기, 연산으로 낙향하여 10여년간 은거하면서 예학연구와 후진 양성에 몰두하였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반정의 양 주역인 김류와 이귀에 의해 산림처사로 추천받아 장평, 사업 드이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조정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어 동지중추부사, 행호군 등 여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때는

노령임에도 양호호소사의 직함으로 의병을 모집하고흩어진 민심을 수숩하는데 앞장섰다.

  인조가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을 정식 국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승논의가 일어나자, 그것이 불가함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당시 그에 찬동한 이귀, 최명길 등과는

물론 인조와도 심한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  사친의 추존을 통해 왕권을 확고히 하려는 인조의 의도는 이해하면서도, 성리학적인 예의 원칙을 들어 원종 추승을

반대함으로써 왕권강화도 성리학적인 원칙아래에서 가능한 것임을 강변하였다. 결국 원종의 추승은 강행되었으나 성리학적 원칙을 들어 반대한 김장생에게

사대부의 여론이 집중되었고 이것이 뒷날 디호 산림으 중앙 정치 진출의 원동력이 되었다.

  1630년 가의대부로 임명되는 등 인조와 조정은 그의 출사를 간곡히 요청했으나, 원종의 추승논의 이후로는 향리에 머물면서 제자와의 강학에만 열중하면서

노년을 마쳤다.  그의 제자는 아들이자 학무의 정통을 이은 김집과 송시열을 비롯해서 송준길, 이유태, 강석기, 장유, 이후원, 신민일 등 후일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은 거의 망라되어 있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 안성의 도기서원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