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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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Spoon

칼국수, 찬바람이 부는 날 뜨겁게 후루룩

안젤라Angella 2020. 11. 1. 03:42

 

 

찬바람이 쓸쓸하게 불거나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할머니는 매끈한 병을 찾아 밀가루 반죽을 밀었다. 멸치 육수의 비릿한

 

냄새가 집안에 퍼질 때쯤 국수를 자르는 칼질 소리가 군침을 돋우고,,,,부엌 어디에선가 잠자던 갖은 재료들이 모두 들어

 

간 칼국수 한 그릇으로 저녁 밥상에 왁자지껄 따뜻한 행복이 넘쳐났다. 한국 사람치고 국수 한 번 안 먹어본 사람 없고,

 

국수에 얽힌 추억 하나 안 가진 사람이 없다. 결혼식에 가면 갈비탕이나 뷔페를 먹는 요즘도 "국수먹는다"는 말은 "결혼

 

한다"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잔칫날엔 "잔칫국수"를 먹고, 휴게소에서 "가락국수"를 먹는다.   "라면"은 밥 다음으로 친

 

숙한 음식이 되었다. 국수는 우리 삶 속에 아주 깊이 들어와 있다.  마치 유전자에 새겨진 것처럼 문득 한 번씩 먹고 싶다

 

는 생각을 하게 되는 국수에 대한 기억은 언제, 어디서 시작됐을까?   어떻게 우리네 삶에 들어왔을까?

 

 

 

 

 

 

조상님께 바치는 귀한 국수, 우리 국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을 다녀와 서 쓴 "고려도경"에 있

 

다.  서긍은 "맛있는 음식 십여가지가 있는데 그중 국수를 으뜸으로 친다"고 했다. 또, "고려는 밀을 화북지방에서 수입하

 

고 있으며, 밀가루의 값이 매우 비싸서 성례 때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시대에 편찬한 <고려사>

 

에서는 "제례에 국수를 쓴다"는 기록이 있다. 겨울 밀은 보리보다 수확이 늦다.   우리나라에서는 밀을 심으면 수확한 다

 

음에 벼를 심기가 어렵다. 쌀을 주식으로 삼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밀보다는 보리를 주로 심었다.   이런 이유로 밀이

 

흔하지 않았다.  국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벼농사를 포기하고 밀을 심거나 중국에서 밀을 수입해야 했다.  이 비싼 밀로

 

만든 국수도 귀하고 귀해서 왕이나 양반들만 먹는 음식이었다.  음력 유월 보름인 유두절은 밀 수확 철과 겹친다.   유두

 

철 제사에는 갓 수확한 밀로 국수를 만들어 조상님께 올렸다. 귀하고 좋은 것을 조상께 바친다는 의미가 더해져 제사에

 

국수를 밥보다 위에 놓았다. 안동의 양반가에서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건진국수"는 이렇게 생겨났다.

 

 

 

 

 

국수의 긴 면발은 장수와 가문의 영속성을 의미한다.   평상시 먹을수 없었던 귀한 음식인 국수를 결혼식과 같은 잔칫날

 

특별히 만들어 먹었다.  잔치국수의 전통은 여기서 출발했다.  오늘날 국수는 값싼 음식의 대명사다. 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국수는 조상님께 바치거나 특별한 날 먹기 위해 만드는 귀한 음식이었다. 사찰의 패스트푸드, 국수,  우리나라에 국

 

수를 보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은 승려들이다. 특히 송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은 국수의 추억을 귀국할

 

때 함께 가져왔다. 송나라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빨리 먹을수 있는 음식이 필요해졌다.  국수는

 

여기에 적합한 음식이었다.  국수는 건조해서 오래 보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끓는 물에 빠르게 조리가 가능하다. 여기

 

에 국물이나 양념을 섞으면 간편하게 먹을수 있는 한 끼 식사가 된다. 송나라때 국수가 다양하게 발전한 것은 국수의 이

 

런 특징 때문이었다.   일본의 소바나 이탈리아 파트타도 빠르고 간편하게 조리되는 특징 때문에 국민 음식이 됐다. 

 

 

 

 

 

 

사찰에서는 많은 승려들이 한꺼번에 식사해야 한다.   국수는 그런 상황에 적합한 음식이다.  물론 승려들이 먹던 국수는

 

오늘날 사찰 국수가 그런 것처럼 주로 채소나 버섯을 이용해서 국물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든 국수를 사찰을 찾

 

아온 참배객들에게 팔기도 했다.  <고려사>에서는 "사찰에서 국수를 만들어 판다"는 기록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빠르

 

고 간편하게 먹기 위한 패스트푸드의 원조가 국수인 셈이다. 일본의 우동이나 소바도 승려들에 의해 전해졌다는 점을 생

 

각해보면 국수는 사찰과 깊은 인연이 있다. 밀가루 대신 메밀,  메밀은 다른 곡식을 심을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

 

란다.  파종후 수확까지 2개월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서 여름이 짧은 산간이나 북쪽 지방에서도 재배가 가능하다.  동아시

 

아 최초로 여성이 쓴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에는 다양한 우리 국수가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음식디미방>에서는 메

 

밀로 만든 국수를 "메밀면"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면"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다른 요리책인 <주방문>도 메밀국수를

 

면이라고 하고 있다.  <고사십이집>에는 아예 "국수는 본디 밀가루로 만든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메밀가루로 국수를

 

만든다"는 구체적인 설명이 나온다.

 

 

 

 

 

밀이 귀했던 우리나라에서는 밀 대신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메밀은 밀과 달리 찰기가 없다. 반죽하기도 힘들고

 

늘려서 면을 만들기도 힘들다.  반죽을 얇게 펴서 칼로 자르거나 국수틀에 넣고 눌러서 국수를 만들었다.   칼국수와 막

 

국수를 만드는 방식이 우리나랴에서 일반적인 면을 만드는 방식으로 정착된 것은 메밀의 특성 때문에 생긴 것이다. 사찰

 

처럼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먹어야 했던 궁중헤서도 국수는 좋은 요리였다.  조선왕조 궁중연회에 등장하는 국수는 대

 

부분 메밀국수다.  심지어 세종대왕 때에는 궁중의 메밀 소바가 많아져서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에 205섬을 더 할당했다

 

는 기록도 남아 있다.  양반가에서도 성인식인 관례가 끝나면 함께 보여 별식으로 메밀국수를 먹었다. 지역에 맞는 다양

 

한 국수들, 국수는 그 역사만큼이나 종류도 다양하다.  국수의 본고장인 중국 산시성에서는 끼니마다 국수를 먹으면서도

 

"좋은 집에서는 같은 국수를 한 달에 두 번 먹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100가지 이상 국수를 만들수 없으면 좋

 

은 주부가 아니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메밀뿐만 아니라 다양한 재료로 국수를 만들었다.   녹두, 마, 칡, 동부,

 

수수, 팥, 율무, 콩, 계란 등이 단독으로 혹은 밀가루나 다른 재료와 섞여서 국수가 됐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변에서

 

나는 지역 특산물을 잘 이용해 맛있는 국수를 만들었다. 제주도에서는 마을 제사때 돼지를 잡고, 그 고기로 국수를 만들

 

어 먹었다.   충청도 내륙에서는 민물고기를 잡아 국수를 끓였다.   전라도에서는 여름 보양식으로 만든 팥죽에 국수를

 

말아 먹었다.   함경도에서는 앞바다에서 잡은 고기로 회를 무쳐서 국수에 비벼 먹었다.  고기국수, 어죽국수, 팥칼국수,

 

회국수는 이렇게 만들어진 국수다.